대표적인 북방형 고인돌, 금현리 지석묘 청동기인의 삶과 지혜를 엿보다

2015.11.15

한국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고인돌을 찾았다. 기자가 찾아간 곳은 경기도 포천시 포천시 호국로 1145번길의 14에 있는 선사시대 유물인 지석묘(고인돌)이다. 이곳은 1983919일에 경기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되었다.

 

 

고인돌은 지석묘라고도 하는데, 유럽이나 지중해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존재하는 고인돌과 비교해 볼 때 한국의 고인돌은 어떤 차별성을 가졌는지 조사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공부가 될 것이다.

 

우선 이 지석묘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자.

 

지석묘는 고인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 굄돌을 지상에 세워서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을 흔히 북방식 고인돌이라고 한다. 이와는 달리 무덤방을 땅속에 두고 작은 굄돌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을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이 금현리 지석묘는 덮개돌과 굄돌 그리고 막음돌을 사용한 전형적인 북방 형태의 탁자식 고인돌이며 그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편에 속한다.  

 

덮개돌은 길이 5.5m, 너비 4.8m 두께 0.65m로 마름모꼴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무덤방은 길이 1.7m, 너비 1.4m로 경기 북부지역의 지석묘 중에서는 비교적 큰 편이다금현리 지석묘는 일제강점기에 도굴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출토유물은 알 수 없지만 규모와 석재를 다듬은 솜씨로 보아 상당한 기술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금현리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사회와 그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유적이다(포천시청 제공).

 

 

덮개돌만 5.5m에 이르는 고인돌은 가까이서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다.

 

 

말 그대로 탁자형이다. 아래의 굄돌과 막음돌은 매우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청동기인들이 만든 지석묘의 제작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땅에 홈을 파서 굄돌을 밀어넣어 받침돌을 세운다.

 

 

두개의 굄돌이 세워지면 봉토로 꼼꼼하게 무덤의 봉분처럼 흙으로 채운다.

 

 

마지막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밋을 만들 때 큰 돌을 운반하며 사용했던 것처럼 나무기둥 위로 덮개돌을 굴려 올려세웠다. 

    

기원전 10세기경에 이런 물리적 힘의 원리를 깨닫고 건축기술을 응용했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정말 영리했다. 어찌보면 사람들의 지능은 일정 시간 진화된 이후로는 아주 오랫동안 멈춰있었던 건 아닐까. 단지 도구만 발전했을 뿐이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Bergson)은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라고 표현했는데 꼭 들어맞는 말이다.​

 

이렇게 먼 시대까지 비유할 필요도 없다. 정조와 함께 수원화성을 지었던 정약용의 경우를 들어보자

 

 

(사진, 문화재청 제공)

 

내년이면 수원화성이 완성된 지 220년이 되는 해이다. 수원화성으로 도읍을 옮겨 노론들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사도세자의 복권을 꿈꿨던 정조가 수원화성의 축성에 쏟은 정성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축성에 가장 일등공신인 정약용은 설계는 물론이고 거중기라는 물리적 힘의 원리를 이용하는 기계를 만들어 완공기간을 원래 예상했던 10년에서 29개월로 단축시켰을 뿐 아니라 경비도 4만냥이나 절감했다고 한다.

 

219년이 지난 지금 건축공법엔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겠지만, 그때 사용되었던 힘의 원리는 여전히 지금도 중요한 기술들 속에 녹아있을 것이다.

 

덮개돌 아래에는 좌우측에 듬직한 굄돌이 보이고 정면으로 막음돌이 서 있다. 원래는 이 앞에 있어야 할 정면 막음돌은 일제 강점기 때 도굴꾼이 청동기 부장품을 훔쳐갈 때 훼손되거나 사라졌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바로 옆에 묻혀 있는 이 돌이 그 막음돌이었으면 좋겠지만, 어디에도 이 돌에 대한 명백한 자료는 없다. 아무리 쳐다봐도 같은 화강암으로 보인다. 그 오랜 세월 그 곁을 지켜온 이 돌덩이가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세계사를 보면, 자의든 타의든 다른 나라를 정복했을때 문화재도 그들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본국으로 가져가거나 도중에 매매한 경우는 많다.

 

 

 

(사진, doopedia.co.kr제공)

 

예를 들어 신라시대 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권자본인 다라니경이 대영박물관에 있는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대영박물관은 영국 침략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영국은 무슨 명분을 내세워 그 많은 유물들을 런던에 모아놓고 각국의 피해자들을 불러다 구경시키는 것일까? 초등학생의 양심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만큼 다른 나라 소유의 소중한 문화재를 훼손한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일본사람들 때문에 훼손되거나 사라진 문화재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일제가 우리의 문화재를 마구 강탈할 시절, 간송 전형필 선생이 전재산을 털어 일본인들에게 역으로 사들인 경우는 오늘날까지도 귀감이 되는 사례이다. 일화를 간단히 소개해보자.

 

1942년
늦여름, 한남서림. 창밖을 보던 간송의 눈에 옛 서적을 거간하던 이름난 골동품 상인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바쁘게 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그를 붙잡고 인사를 나누니, 사연인즉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는 것. 책 주인이 일천 원을 불렀다고 하는데 그래서 돈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찍어낸 훈민정음 원본은 당시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었는데, 만약 그것이 발견된다면
조선총독부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뻔했다. 간송은 거간꾼에게 즉시 일만 일천 원을 건네며 책 주인에게 일 만원을 전하고 일천 원을
수고비로 받으라고 했다. 물건 값은 제값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신조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해서 훈민정음(국보 제70호)원본을 간송이 소장하게
되었다.

 


(글, http://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808&bbsId=BBSMSTR_1008&mn=NS_01_10에서 발췌)

 

​한마디로 전형필 선생은 문화재수호를 통해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런 저런 이유로 전세계에 흩어져 보관되고 있는 문화재를 다시 반환받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이처럼 명백히 훼손한 문화재에 대해서는 납득할만한 보상과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석굴암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공부한 후에 다음 기사에 다룰 예정이다.

 

 

 

은행잎에 둘러싸인 안내석의 뒷편으로 270년된 보호수가 울창하게 서 있다.

 

 

 

270년된 느티나무 보호수라고 한다. 270년이란 세월동안 이 마을 사람들과 고인돌을 보호해 준 듯 늠름하게 서 있다.

 

    

 

반듯하게 서 있는 보호수의 안내판.

 

 

 

하지만 보호수의 간판은 좌측에 있는 지석묘의 안내판과 나란히 서 있기 보다는 우측 뒷편으로 옮기면 어떨까? 지석묘 안내판은 왼쪽 아래쪽에 거의 누워있기 때문에 언뜻 보호수가 강조되어 보인다.

 

 

청동기 시대, 그러니까 대략 기원전 10세기경에 세워진 이 화강암 표면을 실체현미경으로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혹시 작은 조각이라도 떨어진 게 없나 해서 한참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바위에 붙은 지의류라도 조금 뜯어오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더욱 엄청난 유혹을 시달려야 했다.

 

 

 

그간 기자가 찾았던 포천의 여러 문화재들에 설치된 QR코드는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빠른 대책을 만들어주기 바란다. 관리담당 공무원들만 사용하는 QR코드가 아니라면 말이다.

 

 

문화재청의 경고에는 아랑곳없이 보란듯이 바로 아래에 쓰레기를 버려두었다. 대체 무슨 까닭일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간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날 이후로 문화재 답사를 갈 때는 반드시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면 문화재청에서 보수해야 할 것이다.

 

 

사거리 앞 신호등 위에 걸려 있는 유일한 이정표. 국보는 아니지만 엄연한 경기문화재로 지정된 이상, 최소한의 안내표지판은 필요해 보인다. 문화재는 존재 그 자체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후손들이 찾아 그 뜻을 기리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석묘 바로 입구의 모습이다. 그 어디에도 표지판이 보이지 않아서 제자리를 맴돌았다.

 

    

 

 

이 간판들이 못봤다면 아마 기자는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다.

 

항상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느끼는 점은 문화재의 보존과 관리는 문화재청 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의무라는 생각이 든다.

 

글쓰기 평가현수랑 기자2015.11.16

고인돌로 시작해서 문화재 약탈과 간송 전형필 선생에 대한 이야기, 문화재 보존과 관리에 대한 이야기까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어린이과학동아 기자단은 현재 문화재청과 함께 기자단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친구의 기사를 나중에 문화재청으로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관우 친구의 멋진 기사를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자꾸 기다려진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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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
너무 아름다워요~
이런아름다운 문화재를 왜 모르고있었는지...
우와~!!기사를 정리도 잘 하시고 잘 쓰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도굴꾼들이나 유물을 훼손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 짓을 하는 지 이해가 안 돼요.
맞아요.모두가 지켜야할 우리나라문화재들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