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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히틀러에게 맞서기 위해서
세계사를 공부해 보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아돌프 히틀러가 누군인지는 거의 모든 이들이 잘 안다. 독일 민족이 가장 우수하고, 유대인들이 가장 천하다고 여겼던 정치가. 뛰어난 웅변술로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사회가 실감하게 한 지도자.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끔찍했다고 불리는 유대인 학살을 가차없이 감행한 통치자.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세계평화를 무시하고 세계 2차 대전을 기어코 시작해버린 도전자. 이것이 사람들이 아돌프 히틀러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일 것이다. 이 이미지들이 따지고 보면 딱히 틀린 이미지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한쪽에 치우친 이미지는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전혀 돕지 못한다. 인물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인물 그 자체를 입체적으로 보아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인물의 배경, 가치관, 상황과 그에 따른 말과 행동의 의도 등의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인물을 여러 방면에서 보아야만 하는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다. 어느 대상이든 한쪽 면만의 이미지만 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대상의 다른 면에 대한 정보들을 모두 튕겨내버리고 있을 수도 있다. 무의식 중에 대상에 대한 선입견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편견이 위험한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는 정보와 달라서 받아들이기 조금 껄끄럽더라도 수용적으로 받아들여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비판적 시각은 유지하되,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히틀러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알아보는 것 역시 히틀러라는 인물에 대해 더 잘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1. 아돌프 히틀러의 일생
아돌프 히틀러는 일단 놀랍게도 독일 출신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출신이라고 한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었지만 독일 민족, 즉 키가 크고 흰 피부에 푸른 눈, 금발을 가진 아리아 민족을 동경했다고 한다. 그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에서 6명의 형재자매 중 넷째로 태어났고, 가족에게는 '아디'나 '볼프'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8F%8C%ED%94%84_%ED%9E%88%ED%8B%80%EB%9F%AC
어머니는 클라라 푈츨, 아버지는 알로이스 히틀러였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가 학력이 낮은 세무 공무원이었는데, 난폭한 성격이어서 술을 마시고 가족들에게 자주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몇몇 학자들은 후일에 드러나는 히틀러의 폭력성의 근원이 아버지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예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가정폭력도 대물림된다고 한다. 자라나며 폭력을 경험한 아이가 커서 자신의 아이에게도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부모에게서 폭력을 배우는 것이다. '난 커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여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을 주는 것에 서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본인도 모르게 자신이 당했던 것을 그대로 아이에게 갚게 되는 것이다. 히틀러의 예시도 이럴 수 있다. 어릴 때부터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되어왔기 때문에 커서도 자신이 잔혹하게 죽인 사람들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라나며 상급학교에서 그리 좋은 점수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아들이 자신처럼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히틀러는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들을 스케치하는 것에 이미 푹 빠져버렸고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억지로 진학시켜야 했다. 히틀러는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지 않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폭력적인 강요에 마지못해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실업계 학교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꿈을 짓뭉게버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학업에 집중하지 않았고, 결국 좋은 실적을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가 15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이때 가장 슬퍼했던 사람은 아돌프 히틀러였다고 한다.
이에 더욱 공부할 의욕을 잃어버린 아돌프 히틀러의 성적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결국 그는 린츠에서 쫓겨나서 스테이르에 있는 작은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16살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놀러다니다가 길거리에서 잠이 들어 이로 인해 그 후로 술을 단 한 번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907년 비엔나로 여행을 떠나, 비엔나 예술대학교의 일반 미술학교에 응모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히틀러는 이 시험에서 떨어지게 되었고, 어려운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는 린츠 학교에 진학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남긴 작품들은 작품의 수준에서도 상당히 좋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 '성모 마리아와 유년 시절의 예수', 그리고 '바다의 야상곡' 같은 작품들을 말한다.
그가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띄게 된 것은 빈에 머물었을 때부터라고 한다. 빈 사람들은 동방신교회의 유대인들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히틀러가 여기에 머물며 독일 인종 우월주의에 서서히 물들게 되었다. 란츠 폰 리벤펠스, 카를 뤼거, 비엔, 게오르히 리터 폰 쇠너러 등의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자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나중에는 오스트리아에서의 병역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가 오스트리아에서 병역을 서게 되면 유대인들과 섞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영혼은 이미 자신이 독일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는 나중에 무리한 배상금으로 경제 공황이 독일을 휩쓸고 있을 때 그 원인으로 유대인들을 지목하게 되고 유대인 학살도 서슴지 않게 된다.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국들이 승리한 가운데 유럽은 이 전쟁의 원인이자 모든 문제의 책임을 지게 할 대상을 독일로 정했다. 그로 인해 몇몇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에게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물리게 된다. 독일은 감당할 수 없는 배상금을 물게 되자 돈을 많이 찍어냈고 결국 화폐가치가 심하게 변동하면서 유럽 경제에서 나아가 세계 경제를 무너뜨리게 된다. 이 경제 공황 속에서 피폐해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독일인들에게 히틀러는 달콤한 미끼를 던지며 유대인을 이 공황의 원인이라고 선언했다. 이렇게 히틀러는 민주적 절차 속에서 당당하게 지도자가 되어 무자비한 통치를 시작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민심을 잃은 독재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수 있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민심을 얻어야 했다. 그렇게 히틀러가 펼친 업적들은 비록 독재정권 유지의 이용수단이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세계가 발전한 데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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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히틀러의 업적
우선 히틀러는 자동차 산업에 큰 발자국을 찍었다. 히틀러는 국민차 프로젝트를 실시하여 많은 독일 국민들이 자동차를 타고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독일 국민 모두가 자유롭고 편리하게 자동차를 타고 다니기를 희망했다. 이 업적은 독일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의 자동차 산업 발전의 큰 원동력이자 동기 부여가 되었다. 아우토반도 아돌프 히틀러가 설치한 것이다. 이 정책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히틀러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만족감에 정점을 찍게 만들었다. 아우토반이라는 말을 한글말로 풀어쓰면 '자동차가 달리는 길' 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이다. 현재에도 독일어권 국가들의 고속도로 시스템이고, 이 무료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는 유럽 전역의 고속 도로와 촘촘히 연결이 되어 있어서 이동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절감할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아우토반 건설 총감에 프리츠 도트를 임명하여 건설을 진행하게 하였다. 국민차 프로젝트와 아우토반의 건설로 인한 이동의 활성화는 히틀러의 앞으로 이어질 악행들을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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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가 히틀러와 같은 사람에 맞서기 위해서
모두가 알듯이 히틀러는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될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다. 혼란의 원인으로 유대인들을 지목하여 일어난 뒤의 일들은 차마 말하기가 거북할 정도로 끔찍하다. 처음에는 가슴에 유다의 별 표식을 달고 유대인 전용 구역을 지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유대인 전용 상점, 유대인 전용 학교까지...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신체적 장애인, 그리고 집시, 노숙자 등 많은 사람들을 학살의 구덩이에 떠민 사람이다. 수용소를 지어 고통스런 방법으로 그들을 죽인다. 홀로코스트라는 일어날 수 없다고만 생각했던 끔찍한 일들을 현실로 만들어낸다. 사람임을 떠나 생명으로도 대해주지 않았던 그런 모습들을 보며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충격을 받았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들을 하나하나 곱씹다보면 어느새 히틀러는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히틀러는 비정상적인 사람이었다고 해도, 그를 따르던 히틀러의 추종자들은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르는 히틀러를 따를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설명한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인 범죄자였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실제로 본 그의 모습은 우리가 평소에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는 아주 정상적이기까지 하다고 하였다. 한나 아렌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바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했을 뿐이다" 그 말은 즉슨 아이히만은 근면한 일반인이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상부의 명령을 생각없이 따른 것은 잘못이었고 오산이었다는 것이었다.
그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큰 범죄가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만약 히틀러가 다시 나타난다면, 히틀러는 아니어도 옳지 못한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꼭 히틀러가 아니더라도 이런 일은 역사에서 자주 일어난다. 예를 들어 매카시즘, 독재자의 폭력적, 억압적 정치, 그리고 친일파 등 이런 크고 작은 부조리들이 사회에서 늘 일어나기 마련이다. 생각없이 이런 것들을 따르다보면 우리도 어느새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그와 반대로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들을 비판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해보다보면 어느새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옳은 정의감을 가지게 된다. 이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깨어있어야 한다. 옳지 못한 것들에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면 안 된다. 이것이 언제 나타날 지 모르는 사회의 크고 작은 부조리들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글쓰기 평가어린이과학동아 기자2021.07.06
히틀러에 대해 정말 많은 자료를 조사했네요. 긴 분량에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어떤 인물에 대한 글을 쓸 때는 그 사람의 일생, 업적을 다 소개하려는 생각으로 글을 쓰기 보다는 그 사람의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은지를 정하는 게 중요해요. 다소 내용이 좀 많고, 어떤 점을 강조하고 싶은지 잘 드러나지 않은 점이 조금 아쉽네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자료 조사를 충분히 하고, 긴 글임에도 자신의 생각을 담아 문장을 이어나가 쓴 점을 좋았어요. 기사 잘 봤어요. ^^
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