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인물, 사도 세자

2022.11.06

안녕하세요. 조나단 기자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왕들이 존재했었습니다. 또한 역대 왕들 중에 가장 장수한 영조도 있는데요. 제가 쓰는 이번 기사의 주제가 이 영조의 아들 "사도 세자"(경모궁)입니다. 이 사도 세자는 뒤주에 갇혀 굶어 죽은 세자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왜 영조는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갇히게 하였을까요. 사도세자는 본디 정신 질환이 있었습니다.(이인증, 반사회성 성격장애, 분노조절 장애, 조현병, 등등...)



또한 이 사도 세자의 정신병에 관한 글이 혜경궁 홍씨의 회상 일기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중록 중-



 



"왕세자가 병이 도지면 딴사람 같아, 도교의 경문인 <옥추경>을 읽고는 뇌성보화천존(도교에 신 이름) 이 보인다고 무서워 하였다"



 



"한번은 화완 옹주에게 칼을 들고 위협하더니, 온양으로 보내 달라 하였다. 이에 화완 옹주가 영조 대왕에게 간절히 부탁해 순조롭게 온양으로 가시게 되었다."



이러한 사도 세자의 행동은 영조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영조는 사도 세자가 영조의 허락 없이 무슨 일을 하면 "왜 나에게 물어보지 않고 스스로 하느냐" 라고 화를 내었고, 일을 처리할 때 영조에게 물어보면 "왜 네가 스스로 결정하여 처리하지 않고 나에게 물어보느냐" 식이였다고 합니다. (출처: 한중록, 한국 헤밍웨이)



또한 영조는 사도 세자와에 관계도 조금 좋지 않았는데요.  사도 세자가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귀를 씻고 화평 옹주(영조의 후궁의 딸,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출처 링크: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70820&cid=49236&categoryId=49236) 를 만날 때는 옷을 다른 복장으로 복착하고 만나였지만 사도 세자가 문안 할 때에는 지금 입고있는 옷 그대로 입고 문안받았다 합니다.





사도 세자에게 불공평하게 대하는 영조 (사진 출처: 한중록, 한국 헤밍웨이 )



 



이렇게 사도 세자에게만 불공평하게 대하였던 영조는 화평 옹주가 일찍 죽자 사도 세자에게 나랏일을 왕세자에게 맡기었는데 영조는 사도 세자가 정사를 영조에게 물어보자 영조는 사도 세자를 꾸짖었다 하는데요. 위 문단 서론 중후반부에 쓴 것이 바로 그러한 영조에 행동입니다. 이러한 영조의 꾸증과 박대와 무관심은 사도 세자에게 큰 영향으로 나타났습니다.



 



-한중록 중-



 



"한 번 꾸증에 놀라고 두 번 격노에 겁내시어, 아무리 장한 기품이라 한들 한 가지라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였다. 또한 영조 대왕께서는 호화로운 행사를  구경하실 때에는 왕세자를 부르시지 않고 동지섣달 사형받는 죄인을 볼 때나 옆에 불러 앉히시니, 어찌 아드님 마음이 서럽지 않을까."



 



또 영조가 사도 세자가 술을 마셨나 하고 왔을 때에는 



 



"그날 경모궁은 억울하고 서러워 괴로워하다가 춘방관을 보자 큰 소리로 대했다. "너희 놈들이 부자간에 화해하지 못하게 하고 , 내가 억울한 말을 들어도 말 하나 해주지 않더니 나를 보려느냐? 다 나가라!" 하시며 쫓다가 그만 촛대가 넘어져 창문에 불이 붙어 불길이 치솟았다.  뜻밖에 불을 보고 영조 대왕은 왕세자가 홧김에 불을 질렀다 하고 더욱 노여워하셨다. "내가 불한당이냐? 불은 왜 지르느냐?" 경모궁은 설움에 복받쳐 밝히지 않으시고 스스로 불을 지른 것처럼 갑갑해 하시며, 아무래도  못 살겠다고 저승전 앞뜰의 우물로 가서 떨어지려 하셨다. 그 때에 놀란 마음을 어찌 말하겠는가"



 



(이쯤 되면 영조가 얼마나 심하게 박대하였는지 알 것 같네요...)



이러한 사정 속에서 영조대왕의 박대를 날로 더하게 받는 사도 세자는 결국 마음의 병을 얻어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상황으로 영조는 사도 세자의 대한 불신과 박대가 여러 해 동안 계속됩니다. 



그런데, 영조는 왜 사도 세자에게 이리 험하게 대했을까요? 영조가 처음부터 사도 세자를 미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세자 (사도 세자)는 어릴 때부터 학문에 능통하여 영조는 일찌감치 왕위를 물려줄 결심을 했고 글과 무예를 가르치며 훈련을 시켰지만 지나친 기대는 않 좋은 결과를 불러내는 법입니다. 이러한 기대는 왕세자에게 부담을 주었고 사도세자는 결국 글보다는 점점 무예와 병법만을 익히게 됩니다.



또한 왕세자가 성장하고 15살, 영조는 사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킵니다. 또 아까 말씀드린 상황이 일어나면서 사도 세자는 점점 영조를 두려워하게 됩니다.(출처: live  한국사)



사도세자가 마음에 병을 얻어, 결국은 궁궐을 나와 황해도를 돌아다닌 일이 들통이 나자 영조는 당연히 사도 세자에게 불같이 역정을 냅니다.(출처:한중록, 한국 헤밍웨이)



하지만 이러한 영조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왕위의 오르기까지의 험난한 시간을 보내며(영조는 무수리의 아들이였습니다.) "왕위의 오르려면 강해져야 한다"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자리잡아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아들을 더욱 튼튼한 왕으로 만들고 싶었고 이러한 능력을 시험하려 사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지만, 사도 세자는 그러한 능력이 있을 줄 알았으나 대리청정을 해내지 못한 점,



 그리고, 영조 시대에는 노론 벽파와 소론이 팽팽하게 갈려서 서로 싸우고 있는 시대에 백성들을 현명하게 다스려야 하는데 왕세자는 대리청정도 재대로 하지 못한 점, 이러한 것들에서 영조는 사도 세자를 "못난 놈"이라 실망하였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사도 세자 ( 원본 출처 네이버 블로그, 링크:https://blog.naver.com/gioimage/221204976988)



 



왕이 되려면 강해야 하는데 실수를 반복하는 사도 세자와 많은 것을 놓치는 그 허약한 몸이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이러한 사도 세자에게는 결국 죽음의 그림자가 닥쳐오기 시작합니다.  특히 이런 사도 세자의 죽음의 기여한 것은 노론 벽파인데요. 소론 벽와 대립하는노론 벽파는 사도 세자를 모함하고 세자의 잘못만 영조 대왕에게 올리며 사도 세자를 비난하였습니다.



또한 나경언 같은 사람의 경우 의 둘째 부인인 정순 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김상로, 윤급 등을 시켜 1762년 사도 세자의 잘못을 영조 대왕에게 낱낱이 고해바치죠. 이러한 상황과 신하들의 모함, 영조의 실망 속에서 결국 사도 세자의 황해도 유람을 들키자, 영조는 사도 세자를 휘령전으로 오라 합니다. (출처: live 한국사)



그리고 영조는 휘령전에 앉아 사도 세자에게 오라는 전갈을 보냅니다. 이러한 휘령전에서의 일은 한중록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는데요. 



 



-한중록 중-



"그 날 영조께서는 즉시 무슨 일이 있을 때만 드나드는 경화문으로 나오셨다. 동궁(사도 세자은 영조 대왕이 오신다는 소식에 겁이 나 가지고 놀던 군사 기구와 말을 멈추었다. 점심때쯤이었는지, 까치 떼가 경춘전을 에워싸고 우는 것이 괴이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나는 그날 내 목숨이 끝날 것을 각오하고 세손(이산)께 부탁하고는 동궁에게 가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들이 무서워" 마침내 영조 대왕께서 휘령전에 앉으시고, 왕세자를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다. 날이 늦고 재촉이 심하여 마침내 나가니 차마 그 광경을 어찌 기록하겠는가. 섦고 섦다. 세손이 세손이 계신 곳에 와서 함께 붙잡고 어찌할 줄 몰랐는데, 내시가 와서 소주방에 있는 쌀 담는 뒤주를 내라고 하였다. "아비를 살려주십시오" 세손이 나아가 아뢰니 영조 대왕은 "나가라!"하며 엄히 호통치셨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해와 달이 어두워졌다. 나 또한 세상에 머물 마음이 없어졌다. 칼을 들어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옆의 사람이 빼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버님, 아버님. 잘못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라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십시오." 하는 소리가 들리니 내 간장이 마디마디 끊어지는 듯 하였다."



 





영조의 의해 뒤주의 갇히는 사도 세자 (사진 출처: 한중록, 한국 헤밍웨이)



 



결국 사도 세자는 이십 일 오후 뒤주 안에서 사망합니다.



조선 시대에서 별 업적없이 한평생을 병에 시달리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결국 아버지에 의해 뒤주의 갇혀 죽은 사도 세자. 



훗날 이러한 행동을 후회한 영조는 경모궁에게 "사도 세자"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 세자는 뒤주의 갇혀 죽었지만 그의 아들 정조는 사도 세자의 무덤을 매우 자주 방문합니다. (이 점에서 정조는 효성이 지극한 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불행한 인생을 살았던 사도 세자의 불행한 인생과 사도 세자를 뒤주의 갇히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 영조의 마음을 한중록으로 풀어서 기사를 쓴 조나단 기자였습니다. 제 기사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쓰기 평가어린이과학동아 기자2022.11.09

비운의 인물이죠. 그래서 사도 세자의 이야기를 많이 다룬 영화나 소설이 많죠. 한중록의 내용을 실제로 발췌하여 사도세자의 극적인 상황들을 잘 소개해 주었어요. 다만, 예문이 좀 길어서 한중록의 내용을 조금 더 짧게 발췌해서 정리해 주면 읽기에 좀 더 수월할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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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5학년이시군요^^
기사 재미있게 봤어요!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너무 슬퍼요ㅠ

아.. 전 만 나이가 5학년이고 지금은 6학년 입니다. 그래도 제 기사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