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지) 종자의 비밀을 밝혀내다, 우장춘 박사님.

2023.07.14

안녕하세요, 이윤슬 기자입니다.



 



오늘은 우장춘 박사님에 대해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우장춘 박사님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계시나요?



 



저는 어린이 과학동아를 통해 우장춘 박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읽으면서 재미있기도 하고,  제가 이렇게 훌륭하신 분을 몰랐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더욱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갔죠.



 



이 기사를 통해 여러분이 우장춘 박사님에 대해 더욱 잘 아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출처 : 네이버



 



 



(출생)



 



박사님의 부모님 중 어머니의 본명은 스나가 나가하루,



(須永長春, 일본명)



 



박사님의 아버지는 우범선입니다.



 



그리고 박사님의 일본이름은 우 나가하루 입니다.



(U Nagaharu, 일본 영어명)



 



박사님께서는 1898년 4월 8일에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미나토구 아카사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現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



 



아버지가 1903년에 고영근에게 암살되어 가세가 기울자 6살 때는 고아원에서 지내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일본과 한국의 경계선)



 



우장춘 박사님은 교토제국대학 공과대학에 진학하고 싶으셨기 때문에 구제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농학실과에 가야만 학비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농대에 진학했다고 합니다.



 



1916년 도쿄제대 농학실과에 입학했을 무렵 우장춘 박사님은 본인에게 한국의 혈통이 함께 흐른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어느날,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 연설을 하는 강당에서 와세다대학에 다니던 한국인 유학생 김철수(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씨가 단상에 뛰어올라,



 



"당장 이따위 연설을 멈춰라! 네놈이 그러고도 조선인이냐!"



 



라고 일갈하며 그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에 박사님은 충격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친구)



 



위의 상황을 이야기하려고, 박사님께서는 김철수 씨를 만나러 갔습니다.



 



박사님께 아버지 성함을 물어보고, 우범선이란 이름을 들은 김철수 씨는 우장춘 박사님께 



 



'당신의 부친 우범선은 역적이고 매국노요.



 



당신이 아버지가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당신이 배운 것으로 봉사하며 살아야 하고 절대로 당신의 조선인의 성을 갈지 마시오.'



 



라고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 줍니다. 



 



그 이후 김철수 씨와 우장춘 박사님은 우장춘 박사님께서 먼저 작고하실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하고 지냈다고 합니다.



 



 



(졸업)



 



박사님께서는 이후 1919년에 졸업하셨고 농림성(현 농림수산성. 한국의 농림축산식품부에 상응하는 행정 기관.) 산하 연구소에 취직하여 나팔꽃의 유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결혼)



 



박사님께서는 1924년에 일본인 와타나베 코하루(渡辺小春)와 결혼하셨습니다.



 



비하인드 스토리에 따르면, 모친 사카이 나카의 친구가 똑똑한 우장춘 박사님께 자기 아들의 가정교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여 우장춘 박사님이 그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 친구의 고종사촌동생이 코하루였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집에서 당연히 자주 만났었을 테고, 결국 사랑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코하루 집안의 남자 어른들이 우장춘 박사님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결국 코하루는 집안과 의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박사님께서는 자녀들을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키우기로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박사님께서는 계속 우씨 성을 사용하셨지요.



 



 



(대한민국으로)



 



대한민국은 우장춘 박사님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독립 후 대한민국은 농업 생산력이 부족해 우량 종자의 개발과 보급이 필수적이었고, 우장춘 박사님과 같은 농학 인재는 대단히 귀중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100만 엔을 이적비로 우장춘 박사님께 주었습니다.



 



현재로는 10억 원 정도의 가치이죠.



 



우장춘 박사님은 이 돈을 한국에 뿌릴 우량 종자를 사는데 다 써 버렸다고 합니다.



 



이후 한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9년간 지내셨으며, 6.25 전쟁 중엔 대한민국 해군 정훈장교로 임관해 소령으로 전역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받고 일본으로 가기 위한 여권을 마련하기 위해 고생하면서 이승만 대통령께도 발급을 도와달라고 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끝내 받지 못하고 임종 소식을 들어야 했던 악연도 있는데, 우장춘 박사님께서 일본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대통령이 일부러 무시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결국 우장춘 박사님은 한국에서 상복을 입고 장례식도 어머니 시신 없이 한국에서 빈소를 차려 치를 수밖에 없었지요.



 



 이때 들어온 조의금으로 우물을 파고 여기에 어머니의 자애로운 젖이라는 뜻의 '자유천(慈乳泉)'이라 이름짓고 돌에 새겨진 글씨도 친필로 썼다고 합니다.



 



 



(마음을 다잡고)



 



대통령님에 의해 농림부장관에 내정되었으나 박사님께서는 거절하셨고, 농가에 수익이 큰 벼와 감자, 무와 배추 등을 개량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제주도, 거제도, 욕지도 등 남부 지역에서의 귤 재배 가능성을 시험하기도 하며 연구에 몰두하셨습니다.



 



실제로 결과가 뛰어나 현재 감귤 산업이 바로 우장춘 박사님의 공로입니다.



 



 



출처 : 네이버



 



 



(연구 이론)



 



우장춘 박사님께서 이룬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1935년 "배추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라는 박사 학위 청구 논문을 통해 '종의 합성' 이론을 제시한 것입니다.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유채를 실험적으로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그 동안은 카더라였던 종간 잡종의 매커니즘과 종의 합성이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밝혔지요.



 



주요 배춧과 작물의 게놈 관계도가 삼각형의 관계를 이룬다고 하여 #우장춘의 트라이앵글#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생물체에서 다른 종 사이의 교잡은 교잡일 뿐이고 새로운 종이 될 수 없다는 그간의 과학계의 정설을 깨트리는 결과를 낳았으며,



 



식물은 돌연변이가 아닌 종간 교잡을 통해서도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결국 '종의 분화는 자연선택의 결과이다.'



 



였던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 또는 거기서 파생된 우생학을 부정하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사망)



 



1959년, 서울메디컬센터에 입원하여 십이지궤양 수술 후 병세가 악화되어 8월 10일에 사망하셨습니다. ㅠㅠ



 



사망 몇 시간 전 박사님께서는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받았지요.



 



병상의 우장춘 박사님께 문화포장 수여 사실과 함께 포장이 전달되자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라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져 옵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정부수립 이래 최초로 사회장이 거행된 한국인이었습니다.



 



우장춘 박사님의 헌신으로 대한민국에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됐고 국민들은 기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장춘 박사님께서 손을 댄 우량 종자들은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이었다고 합니다.



 



 



(생각이나 느낌)



 



박사님께서 어리셨을 때에는 저희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지 나라여서 많이 놀림을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내가 왜 한국인일까? 하고 생각하셨기도 했겠지요.



 



하지만 결국 제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십니다.



 



저는 이런 박사님의 모습이 정말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또 우장춘 박사님께서는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를 잃으셨을 때는 많이 슬프셨을 것 같아요.



 



거기에다가 어머니의 시체도 없이 장례식을 치렀으니...



 



저라면 더욱 슬프고, 힘들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박사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연구에 몰두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 까지도요.



 



제가 박사님을 제대로 닮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그러지 못할 수도 있지만, 박사님처럼 포기 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시작할게요.



 



박사님의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



 



정말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장춘 박사님에 대해 이야기 해보았는데요,



 



여러분께 많은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이윤슬 기자였습니다.



 



지금까지 제 기사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기사는 네이버를 참고하였습니다.



 



 



 



 


글쓰기 평가어린이과학동아 기자2023.07.16

우장춘 박사님하면 과학자로서의 업적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이 분이 한국인과 일본인 부모 사이에서 힘든 삶을 사셨다는 점은 전혀 알지 못했는데요. 어과동 친구들의 글을 통해 국적으로 인한 고충도 많이 겪으셨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과학자로서의 업적 뿐 아니라 우장춘 박사님의 삶에 대해서도 많은 걸 알려준 글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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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