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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토리] 조선시대: 왕자의 난과 태종의 왕권 강화
안녕하세요~ 강민호 기자에요~ 이번에도 역사 특집 기사를 쓰려고 해요. 왕자의 난과 태종의 왕건 강화에 대해 함께 알아볼까요?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태조 이성계는 먼저 세상을 떠난 첫째 부인 신의 왕후와의 사이에서 8명의 자녀를 두었어요. 둘째 부인 신덕 왕후 사이에는 3명의 자녀가 있었죠. 1392년 8월, 신덕 왕후 강씨를 몹시 아꼈던 태조는 첫째 부인이 낳은 장남 방우를 제쳐두고 강씨가 낳은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았어요. 정도전, 배극렴, 조준 등 대신들도 이 결정을 반겼죠. 태조의 첫째 부인 신의 왕후 한씨에게서 태어난 왕자들은 배다른 동생 방석이 세자가 된 것에 불만이 컸어요. 그 중 장남 방우는 정치나 왕위에 뜻이 없었지만, 넷째 방간과 다섯째 방원은 속마음으로 세자 자리를 탐내고 있었죠. 특히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는 등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했지만,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불만이 컸어요.
태조는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개경 대신 새로운 곳을 수도로 정하고자 했어요. 오랜 의논 끝에 한양이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되었죠. 한양은 나라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고, 적의 침입을 막거나 뱃길로 세금을 나르기에도 좋아 수도로 적당했어요. 정도전은 수도 한양 건설의 총책임자가 되었죠. 한양 건설이 마무리되자, 태조의 명을 받아 한양 도성의 성문과 궁궐 곳곳의 이름을 직접 짓기도 했어요.
정도전은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한양 성문의 이름을 지었어요. 동쪽 문의 이름은 흥인지문으로 "인(仁)을 흥하게 하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서쪽 문의 이름은 돈의문으로 "의(義)를 복돋우라"는 뜻이죠. 남쪽 문인 숭례문은 "예(禮)를 높이라"는 뜻이에요. 또 북쪽 문의 원래 이름은 숙청문이었는데 나중에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뀌죠. 한양의 중심 거리에는 커다란 종이 걸린 누각을 세웠어요. 훗날 이 누각을 "신(信)을 널리 퍼뜨리라"는 뜻의 보신각으로 불렀죠. 또, 종묘는 조선 왕조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곳이에요.
경복궁은 1395년에 완성된 조선 왕조의 왕궁이에요. 왕궁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처리하는 공간과 왕과 왕의 가족들이 머물며 생활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졌죠. 경복궁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을 열거나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등 나라의 중요한 행사를 치르던 곳이에요. 그리고 사정전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정책을 의논하거나 공부를 하던 곳이죠. 또, 강녕전은 왕이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던 곳으로, '강녕'은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한하다는 뜻이에요.
정도전은 조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현명한 재상들이 나서서 임금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방우닌은 강력한 힘을 지닌 왕이 나라를 이끄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죠. 이방원은 결국 자신의 큰 장애물이었던 정도전을 제거하기로 했어요. 1398년 8월, 이방원은 아버지 태조가 병에 누워 있을 때를 틈타 사병들을 이끌고 가 정도전을 죽였죠. 이방원의 다른 무리들은 경복궁을 지키는 병사들이 무기를 빼앗았어요. 궁궐을 포위했던 이방원의 사병들은 세자 방석이 궁궐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를 죽였죠. 또한 궁을 나오던 방석의 형인 방번마자 죽였어요. 이로써 이방원은 정도전의 무리와 배다른 동생들을 제거하고 나라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죠.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해요.
이방원은 병중인 태조에게 정도전의 무리가 자신을 죽이려고 해서 먼저 나선 것이라 변명했어요. 태조는 분노했지만 이미 이방원이 모든 권력을 차지한 뒤였죠. 태조는 방원이 원하는 대로 둘째 아들인 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이후에는 감시를 당하며 지내야 했어요. 제2대 왕이 된 정종은 이후 2년간 왕위를 지켰지만, 줄곧 사냥이나 격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죠.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방원의 형인 태조의 넷째 아들 방간은 방원이 자신마저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졌어요. 결국 군사들을 움직이게 되죠. 방간의 움직임을 안 방원은 처음엔 망설였지만, 결국 형에게 맞서고자 군사를 일으켜요. 병력에서 앞섰던 방원의 군사들은 방간의 군사들을 쉽게 물리쳤죠. 방간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방간은 도망을 가다 붙잡혔어요. 방원과 방간이 군사를 일으켜 서로 싸운 이 일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하죠. 방원은 형 방간을 죽이지 않고 지방으로 유배 보냈어요.
난을 진압한 공으로 세자가 된 이방원은 모든 사병 조직을 없앴어요. 이제 힘 있는 세력가가 군사를 거느리는 일을 불가능해졌고, 군사력은 왕에게 집중되었죠. 1400년, 마침내 정종은 왕위를 양보하고, 이방원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이에요.
태조는 이방원이 왕이 된 뒤, 궁궐 밖으로 나가 전국의 산으로 떠돌아다니는 일이 잦았어요. 그러던 중 1402년에는 호위 부대를 이끌고 자신의 고향인 동북면으로 향했죠. 때마침 동북면에서는 안변 부사 조사의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세자 방석의 원수를 갚고 태조에게 충성하겠다며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러나 태종이 직접 반란을 진압하러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반란군 병사들은 겁을 먹었죠. 그 와중에 진영에 불까지 나자, 조사의가 이끄는 반란군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어요. 안변으로 후퇴하던 조사의는 아들과 함께 사로잡혀 처형을 당했죠.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망연자실했어요. 더 이상 버틸 방법이 없게된 태조는 마침내 궁궐로 돌아가게 되죠. 태종은 직접 멀리까지 마중 나와 태조를 맞이했어요. 태조는 궁궐로 돌아오고 6년 뒤인 1408년에 74세로 세상을 떠났죠.
(사진출처: 네이버 포스트)
태종은 이후 왕권을 강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당시 각 관청은 삼정승이 참여하는 최고의 행정 기관인 의정부를 통해 왕에게 정책을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죠. 태종은 1414년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6개 관청(6조)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는 6조 직계제를 실시했어요. 그리고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 도를 다스리는 관찰사를 파견했죠.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길도(함경도), 평안도의 8도가 이때 정해졌어요. 각 도의 이름은 큰 고을의 머리 글자를 따서 지었죠. 또한 16세 이상의 양인 남자들에게 이름과 출생 연도 등이 적힌 호패를 항상 지니고 다니게 해, 나라의 인구를 파악하고자 했어요. 태종은 외교와 국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군사력을 키워 여진족과 왜의 침략에 대비했어요.
이상으로 기사를 마칠께요~ 감사해요~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글쓰기 평가어린이과학동아 기자2023.10.14
민호 친구, 지난 글에 이어 오늘도 역사 주제로 글을 써 주었네요. <왕자의 난과 태종의 왕권 강화>에 대해 써 주었는데요.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줄줄이 나열하는 글은 읽기가 쉽지 않기도 하고, 주제를 전달하는 게 어려워요. 또 이 역사적인 사실을 왜 전달하고 싶은지, 이 사건에 대해 민호 친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의 생각까지도 함께 전달하는 게 중요하지요. 역사적인 사실, 정보를 전달하려 하지 말고 그 사건에 대한 나의 생각이나 해석이 드러나도록 글을 써 보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