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사태와 전두환/노태우 정부에 대해서 알아보자! (상)

2024.01.05

안녕하세요~ 강민호 기자에요~ 이번에는 지난 박정희 정부에 관한 기사에 이어 전두환/노태우 정부에 대해서 써보려고 해요. 함께 알아볼까요?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1979년 12월 12일, 육군 소장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중심이 된 신군부가 12.12 사태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어요. 그래서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 10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헌법을 고칠 것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죠. 그러자 신군부는 5월 18일 오전 0시에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하며 민주화를 원하는 시민들의 바람을 짓밟았어요.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전국의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어요.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휴교령에 항의하며 교문 앞에서 계엄군과 맞섰죠. 그러자 전남대학교 정문을 막아섰던 계엄군이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하였어요. 계엄군이 학생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모습을 본 광주 시민들은 점차 학생들의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죠. 시간이 갈수록 계엄군의 수는 늘어갔고, 더 많은 시민이 시위에 참여했어요.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 충돌이 발생했고,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도 늘어 갔죠.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결국 전남 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총을 쏘기 시작했어요.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쏘자, 시위대는 자신들도 무장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죠. 시위대는 화순, 나주, 해남, 영암 등 시외 지역에 있는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하였고,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어요. 계엄군에게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마침내 시위대는 계엄군을 광주 시내에서 몰아냈죠.



(사진출처: 크리스천투데이)



계엄군이 물러간 광주는 질서를 되찾았고, 시민들은 도청 앞 광장에 모여 계엄군의 잔인한 폭력을 비판하고 투쟁 의지를 북돋았어요. 그리고 광주의 종교 지도자, 기업가, 관료 등으로 구성된 수습 위원회는 계엄군 지휘부와 사태 수습에 대해 논의하였죠. 그러나 계엄군은 광주로 진입하는 교통로를 차단한 채, 시민군에게 조건 없이 무기를 반납하라고 요구했어요. 협상이 진행되는 사이, 신군부는 광주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계엄군을 광주 시내로 투입할 준비를 마쳤어요. 한편, 국내 언론은 신군부의 방해로 제대로 된 보도를 할 수 없었지만,《아시안 월드스트리트 저널》등 외신 기자들이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알렸어요.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계엄군이 곧 전남 도청으로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시민군은 끝까지 계엄군으로부터 전남 도청을 지킬 것을 결의하였어요. 그리고 5월 27일 새벽 5시, 계엄군은 시민군이 지키던 전남 도청을 공격하고 시민군을 진압했죠. 10여 일 동안 이어진 5.18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시민은 지금까지 조사된 것만으로도 사망자 200여 명, 부상자 수천 명에 달하였어요. 광주 시민을 무력으로 짓밟은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권력을 장악했어요. 그리고 신군부의 중심 전두환은 허수아비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어요.



5.18 때 수천 명이 넘게 죽고 다치다니, 정말 안타깝군요.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번 기사에서 쓸께요~ 감사해요~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글쓰기 평가어린이과학동아 기자2024.01.06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글을 써 주었네요. 오늘날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많은 시민들의 희생으로 얻은 것인데요.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죠. 어린이들에게는 몇 십년 전도 꽤 오래된 과거이기 때문에 옛날 이야기라고만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나라의 근현대 역사를 알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정말 소중하고 귀한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네요. 오늘 민호 친구의 글을 읽고 많은 친구들이 지금 누리는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길 바랄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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