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과학동아&수학동아 기사
[연속기획] 나의 조선왕릉 답사기; 제1회 서삼릉, 효릉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얽힌 효릉 이야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얽힌 효릉 이야기
작년 6월부터 아버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을 매달 답사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모두 17기의 왕릉을 탐방하고 그 과정을 관찰일지에 기록하는 중이다. 이 결과물들은 향후 {연속기획, 나의 조선왕릉 답사기}란 제목으로 연재할 계획이다.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조선왕릉은 지난 2009년 6월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6백년간 이어져온 제례와 그 보존의 노력을 인정받아 현재 북한에 있는 제릉(태조비 신의황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정안황후의 능) 등 2기를 제외한 40기 모두가 세계문화유산에 최종 등재되었다.
첫번째로 효릉을 다루는 까닭은 세계문화유산의 등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하거니와 지금까지 다뤄져왔던 소위 스타급 왕들과는 너무도 과소평가된 인종의 사람됨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8-4번지의 서삼릉 지구 서쪽 축협 종축장 능선에 홀로 서 있는 조선 제12대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을 찾았다. 효릉의 특이한 점은 인종의 봉분에는 병풍석이 둘러져 있으나 인성왕후의 봉분에는 병풍석이 없고 단지 난간석만으로 되어 있는 조선왕릉중 유일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중종 10년 음력 2월 25일 초경(저녁 7시에서 9시)에 장경왕후 파평 윤씨가 원자(인종)을 낳았다. 중종 즉위 후 10년이 지나서야 기다렸던 후계자가 탄생했으니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이 간다. 하지만 7일 후 이른 새벽, 산후병으로 중궁은 세상을 떠나고 어미 없는 인종의 험난한 인생의 막이 오르게 된다.
인종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6세에 세자로 책봉됐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늘 공손하고 인자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며 엄숙한 생활을 해나갔다. 부왕인 중종이 편찮을 때에는 손수 탕약의 맛을 보고 잠자리를 봐줄 만큼 효자였다. 무려 25년간 세자 교육을 철저히 받은 인종이 30세 되던 해에, 부왕 중종은 승하하고 만다. 인종은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그랬듯이 중병이 생길 만큼 슬퍼하다 끝내 기절하고 만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인종은 이복동생인 경원대군(명종)에게 전위한 뒤, 다음 날인 1545년 7월 1일 경복궁에서 훙서(임금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했다. 부왕의 죽음을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25년간이나 세자교육을 받은 인종은 즉위 8개월 만에 왕으로서의 어떤 치세도 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조선시대는 유교국가이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 유교국가가 지향하는 최고의 선이다. 이와 같이 임금의 자리보다는 부모에게 극진히 효성을 다한 인종의 효릉이 무슨 이유로 골프장과 국립종축장으로 둘러싸여 있는지 안타깝다. 게다가 축협사유지 한가운데 위치한 까닭에 조선왕릉관리소 직원 이외에는 일반인의 관람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곳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지난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선정과정에서 제외될 뻔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문광부 장관이었던 유홍준 장관의 주도 아래 40기에 이르는 왕릉을 한꺼번에 등재시켜야한다는 연속등재(serial nomination) 전략에 따라 가까스로 편입되었다.
1970년대 문화재보다는 경제부흥을 우선시하며 무차별적 개발을 자행했던 어리석은 정치적 판단 덕분에 인종과 같이 인자한 왕릉이 세계문화유산 선정대상에서 배제될 뻔 했던 것이다.
더구나 등재 이후에도 세계문화유산 심사기구이자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전문가를 파견해 현지실사를 한 결과 이처럼 훼손된 효릉의 원형 복원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 효릉 주변의 지형과 금천교, 수복방, 수라청의 복원도 절실하기만 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엄격한 사료에 근거한 복원과 더불어 축협관계자와의 원만한 협의를 통해 빠른 시간 내에 효릉이 국민들에게 공개되어 인종의 효심과 인간됨을 널리 알리고 이를 기릴 수 있는 정당한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답사를 마치고 효릉을 나서는데 문화관광해설사가 효릉 바로 앞 비탈에 오롯이 서 있는 소나무를 가리킨다. 예전에는 TV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면 애국가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때 화면에 나오던 소나무라고 한다. 아직도 부왕의 죽음을 슬퍼하는 인종의 어질고 애닮은 모습이 그대로 녹아있어 보여 안타까웠다.
글쓰기 평가현수랑 기자2015.10.08
우와~! 윤관우 기자의 연속 기획 정말 기대되네요. 친구의 기사를 통해 인종의 왕릉과 인종에 대해 자세하게 하지만 재미있게 알게 됐어요. 수정했으면 하는 부분은 <지난 2009년 6월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6백년간 이어져온 제례와 그 보존의 노력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앞에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물론 그 앞부분에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중간에 연재에 대한 이야기로 흐름이 끊어져 다시 한 번 짚어 주는 내용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기사가 시작될 듯해요. 그 앞부분은 기사의 서문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내용에서는 <왕릉을 한꺼번에 등재시켜야한다는 연속등재(serial nomination) 전략에 따라 가까스로 편입되었다> 라는 내용이 반복되고 있는 부분이 어색해요. 그만큼 중요한 내용이라 반복한 것이겠지만 앞부분의 <그러나 세계문화유산은 그 전체가 등재되어야 한다는 기본 원칙때문에 포함되었던 것이다.>를 빼는 것이 글을 읽을 때 더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게 되네요.
앞으로도 계속될 흥미진진한 왕릉 이야기를 기대할게요!!!
저두 가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