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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 이항복 선생의 묘를 다녀오다 당쟁에 맞서다 당파에 희생된 한 선비의 이야기
기자는 지난 10월 31일, 조선시대 선조 임금 시절의 명신 이항복 선생의 묘역을 방문했다.
이항복 선생의 묘역이 있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번지, 좁은 시골길섶에 도착했다.
마을은 선생의 성품처럼 아늑하고 청렴한 신념처럼 깨끗한 모습이었다.
왕릉은 물론이고 옛 선비들의 묘역을 찾을 때면 언제나 그 분들의 업적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가 떠올라 숙연해진다.
조선 중기의 정승 필운(弼雲) 이항복(1556∼1618) 선생의 영정(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이항복 선생에 대해 알아보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 고려의 대학자 이제현(齊賢)의 방손(傍孫;형제와 같이 공통의 조상을 통하여 갈라지는 관계) 자손이며, 이성무(李成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예신(李禮臣)이고, 아버지는 참찬 이몽량(李夢亮)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결성현감 최륜(崔崙)의 딸이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 이제현의 후손이며, 특히 죽마고우인 이덕형과의 많은 일화로 인해 오성과 한음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선조 13년(1580)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여립 모반사건의 공으로 평난공신의 호를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도승지로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몽진을 갔었으며, 그 후 이조참판, 병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오성부원군 등의 벼슬을 거쳤다. 광해군 9년(1617) 인목대비 김씨를 왕비에서 폐위하자는 주장에 끝까지 반대하다 1618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 이항복 선생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쪽이든 당파의 힘에 기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선조의 신하로서, 그리고 선비로서의 양심에 호소하다가 홀로 희생되었다.
아래 사진들과 함께 이항복 선생의 묘역을 살펴보자.
깨끗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안내표지판이 인상 깊었다. 문화재가 잘 보존유지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다행스러웠다.
설명문은 요점이 잘 정리되어 있어 이항복 선생의 삶을 명료하게 풀어주고 있다. 하지만 맨 아래에 있는 QR코드는 분명 스마트폰으로 스캔하면 자세한 설명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전혀 읽어들일 수 없었다. QR코드에 문제가 있어 보여 아쉬웠다.
1975년 9월 15일, 기념물 제24호 선현묘역으로 지정된 이항복 선생 묘역의 안내표지석.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영당(影堂)의 모습. 20미터 뒷쪽으로 선생의 묘가 있다.
문이 잠겨져 있어서 담 너머로 팔을 뻗어 촬영했다. 관리인이 애초에 없는 것으로 보아 저 문이 열릴 날은 제사때 외엔 없을 것 같았다. 또한 현관문에 치렁치렁 매달린 거미줄과 마루에 내려앉은 뽀얀 먼지를 보니 왠지 저 문을 개방한지는 무척 오래되어 보인다.
묘소 바로 아래에서 내려다 본 영당의 모습. 아담한 모습이 이항복 선생의 검소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신도비 바로 왼쪽에 위치한 '경주이씨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 선생 묘역 관리소'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근처에 새로 짓는 건물이 있었는데, 아마도 새로운 관리소를 신축하는 중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 흉물스런 관리소부터 철거하는 건 어땠을까.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살짝 들어가 봤는데 '전설의 고향'이 따로 없었다.
조선시대 이항복 선생의 사회적 인격적 지위를 말해주는 것이 바로 이 신도비다. 왜냐하면 보통 신도비는 왕이나 정2품이상 신하의 능에만 왕명으로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1632년(효종3)에 세워진 이 신도비는 중국의 황제가 선물한 운석에 당대의 명문가였던 상촌 신흠 선생이 직접 작성하였고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김집이 글씨를 쓰고 병자호란 때의 충신이었던 김상용이 전서했다. 묘역의 맨 좌측에 배치된 신도비 모습. 예전 사진을 보면 신도비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최근에 전각을 신축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빼곡히 들어선 신도비의 내용이 무척 궁금하다. 전문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요약본이라도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올려주거나 현장의 안내문에서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유적지에 와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같은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당시의 학자들은 그를 어떤 사람으로 평가했을까.
신도비에서 바라 본 이항복 선생 묘역의 모습. 소나무 아래로 햇살이 퍼지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풍수를 믿는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단순한 묘역이 아니라 역사공원으로 인지도를 높여서 많은 사람들이 찾았으면 좋겠다.
죽엽산 능선을 따라 뻗은 추산 자락에 경주이씨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할아버지 이예신과 아버지 이몽량의 묘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왼쪽 봉분이 이예신이고 오른쪽이 이몽량의 봉분이다. 한문을 읽느라 고생하다보니 갑자기 세종대왕께 절이라고 하고 싶어졌다.
2개의 작명등이 붙어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작명등이 없는 왕릉도 있는데 하물며 제 아무리 명문가의 묘역이라해도 2개나 있는 건 실수이거나 뭔가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다.
이예신 선생의 풍수적 지혜 때문인지, 이후 경주이씨 상서공파는 6분의 정승과 2분의 대제학 등 셀수 없이 많은 인재를 배출했던 최고의 명문가였다.
이항복 이래로, 우리나라 항일광복운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 우당 이회영(李會榮1867~1932)은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다. 또한 이회영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李始榮:1868~1953)의 친형으로서 이들 모두 이조판서 이유승(李裕承:1835~1906) 공의 아들들이다. 이정도면 경주이씨 상서공파를 '삼한갑족'이라고 부를 만도 하겠다 싶었다.
망부석에 붙어 있는 이끼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이항복 선생의 검소한 사람 됨됨이를 보여주듯 단아한 모습의 능참. 묘비,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있고 양측에는 문인석과 망주석 한쌍이 각각 서 있다. 왕릉의 그것과는 비교가 될 만큼 소박한 크기와 모습의 문인석이다. 망주석의 세호도 왕릉과 비교하면 작고 섬세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청렴한 선생과 더욱 잘 어울린다. 요란하게 장식된 고석도 보이지 않는다. 요즘 조선왕릉을 답사중이라 그런지 모든 부분을 왕릉과 비교하게 된다. 아마 문화재청에서 기본적인 관리는 하겠지만, 경주이씨 상서공파 문중에서도 관리 보존에 힘쓰고 있는 듯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이다.
<정경부인 안동권씨의 묘, 의정부 영의정 오성부원군 이공의 묘>라고 적혀있다. 부인인 안동권씨는 권율장군의 딸이다. 당대 최고의 문인인 선생의 묘비치고는 소박하다.
뒷편에서 내려다 본 풍경. 자세한 건 모르지만, 풍수지리상 얼마나 좋은 자리일까.
이항복 선생 부부의 쌍봉 동쪽 아래에 정경부인 금성오씨의 무덤이 있다. 금성오씨는 이항복 선생의 두번째 부인이다. 백사선생이 1618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될 때 북청까지 따라가서 생을 마감할때까지 함께 했으며 이후 이곳에서 모시고 와서 장례를 치른 뒤에도 6년간이나 여막살이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인조로부터 정경부인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광해군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려고 했을때 결사반대를 하자 정인홍의 탄핵을 받았고, 인목대비 김씨의 폐모론에 맞서다 끝내 북청이라는 머나 먼 곳으로 유배를 가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 이항복 선생. 40여년을 벼슬에 있으면서도 그 어느 당파에도 물들지 않는 청렴한 인품으로 나랏일을 돌본 이항복 선생이 있었기에 임진왜란과 같은 국난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위인들이 들려주는 역사적 교훈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다가온다.
신도비를 쓴 상촌 선생의 말을 전하면서 기사를 마친다.
조정의 사대부가 당파를 지어 서로 배척한 지 40여 년 동안 현인이나 불초한 자가 각기 자기의 당을 표방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나 공만은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중립하여 태산(泰山) 교악(喬嶽)처럼 우뚝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비난하지 못했으며 임인년(1602, 선조35) 이후로는 시사가 날로 어긋나 여러 올바른 사람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니, 공은 비로소 조정에 있는 것을 편치 않게 여겼다. 나중에 두 차례 정승자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그대로 있지 않았다. 광해가 즉위했을 때 다시 의정부에 들어간 것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서 다시 나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으나 시사가 크게 잘못된 점이 있었으니, 어찌 국가의 불행이 아닌가.
-상촌선생집 제27권
윤관우 기자
글쓰기 평가현수랑 기자2015.11.11
뭐라고 지적할 부분이 전혀 없는 좋은 기사예요. 정말로요 ^^ 역사학자가 쓴 탐방기를 보는 느낌까지 들 정도네요. 사진 때문에 애를 먹었지만 사진과 자세한 글이 가보지 않았는데도 직접 다녀온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들어요. 정말 잘했어요~!!!!! 참, 제목만 조금 수정할게요 ^^
글쓰기 평가현수랑 기자2015.11.10
이번에도 사진이 보이지 않아요 ㅠ_ㅠ 도대체 왜 이런 걸까요? 일단 기술지원팀에 문의해 보고 메일로 결과를 알려 줄게요. 기사는 보류해 둘게요.
글쓰기 평가현수랑 기자2015.11.09
일단 사진이 전혀 보이지 않아 기사를 보류 할게요. 사진 수정을 부탁해요. 기사로 보면 이항복 선생과 묘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먼저 하고 사진과 설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친구의 기사를 보다보면 정말 만나고 싶어지네요 ^^ 다음에 취재하러 가겠어요~!
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