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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의 묘역을 다녀오다. 조선의 임금들이 가장 사랑한 대군.
지난 11월 1일 기자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산46-1에 위치한 경기기념물 제130호 인평대군 묘 및 신도비를 찾았다. 조선역사에 상당히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누구인가?
병자호란 당시 만주족 황제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던 인조에게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소현세자는 전쟁 후 1636년부터 8년간 포로생활을 하다가 1644년 귀국했지만 느닷없이 급사했고, 둘째 봉림대군도 함께
포로생활을 하였으나 소현세자와는 달리 반청의식이 강했다. 보위에 오른 후에는 북벌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두 명의 아들 외에도
또 한 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바로 인평대군이다.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은 인조의 셋째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으로 이름은 요(㴭),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이다. 1629년(인조, 7) 인평대군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이후 1640년(인조, 18)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온 이후, 1650년(효종, 2)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 사신)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두 형들보다 훨씬 늦게 볼모로 북경에 갔었지만 이후 사신의 자격으로 무려 13번이나 압록강을 건너 북경을 오갔다. 사신의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노숙을 밥먹듯하며 한 나라의 임금의 아들이자 동생이라는 귀한 신분에도 아랑곳없이 나라를 위해 희생했다.
학문에도 소양이 깊어 제작백가에도 정통하였고, 시·서·화(詩·書·畵)에도 뛰어났으며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 가깝게 지내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희귀한 편인데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산수도 山水圖》, 홍성하 소장의 《노승하관도 老僧遐觀圖》, 정무묵 소장의 《고백도 古栢圖》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런 면에서 인평대군은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과 비교되기도 한다. 비슷한 이름 만큼이나 시서화에 있어서 실력을 견줄만했던 것이다.
인평대군의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이다. 시서화에 능한 인평대군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사진,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제공)
왕릉의 능침처럼 높은 강(岡)에 올라오니 햇살이 어찌나 좋던지 아빠랑 한참을 앉아 있었다. 왕릉의 능참에서는 너무 조심스러워서 차마 앉을 생각도 못했는데 인평대군의 묘역에서는 편하게 맘껏 쉬었다.
인평대군의 묘 및 신도비에 대한 안내판. 새들의 분뇨가 미간을 찌푸리게 만든다. 하지만 이것도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이것을 관리 소홀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조선이 남긴 대부분의 문화재가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으니 그렇게 이해하자.
신도비는 효종 9년(1658)에 건립되었으며, 귀부와 이수는 웅장하면서 화려해 정교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신도비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비문은 왕명을 받아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이 지었고 비문의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전액은 오정일이 했다(포천시청 제공). 이 신도비의 전문 역시도 무척 궁금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엄청 힘든 일이겠지만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런 작업을 펼쳐 나갔으면 좋겠다.
승정원 일기(사진, 문화재청 제공).
예를
들어 승정원 일기의 경우는 세계최대의 단일 왕조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실록과는 달리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한 것으로 그 양은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번역작업도 매우 힘들어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 왜냐하면 사관들이 초서(흘림체)로 쓴 일기를
해서(정자체로 쓴 글체)로 다시 바꿔쓰고 그것을 번역한 뒤 디지털 작업까지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 번역작업이 완성되면 아마 우리나라
조선의 역사책은 상당부분 수정과 보완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매우 연구가치가 높은 사료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 작업은
한시라도 늦출 수 없다.
이런 점에서도 전국에 흩어져있는 신도비들의 전문 역시 문화재청에서 나서서 전문적인
학자의 도움을 받아 일관되게 번역하고 디지털화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신도비의 귀부는 상당히 용맹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늘 높이 고개를 쳐든 당당한 모습과 비신 상부의 양각도 상당히 화려한 편이다. 아마도 임금들의 하나같은 사랑을 받아서 그런 것 같다. 나중에 다른 대군들의 묘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군묘의 석물들은 왕릉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모습이다. 곡장에 둘러진 묘 정면에 비석이 서 있고, 혼유석은 귀면의 고석이 받치고 있으며 그 앞에는 작은 향로석이 있다. 양쪽으로 망주석이 있는데 각각의 세호는 조금씩 다른 모습이지만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다. 그리고 맨 앞 가운데에 장명등이 서 있다.
한쌍의 문인석과 혼유석 조금 앞 양쪽에는 작고 단아한 모습의 동자석이 한쌍 서 있다. 왕릉에는 없는 이 동자석은 어떤 의미일까. 이항복 선생의 묘에는 없었는데 정경부인 금성오씨의 묘에는 있었다. 정승의 묘에는 없는데 그 둘째부인의 묘에는 있다는 사실과 그보다 훨씬 높은 신분인 대군의 묘에도 있다는 점에서 어떤 일관성도 보이지 않아 더욱 궁금하다.
조금 특이한 것은 동쪽 문인석 뒤에 귀부만 있고 비석의 몸체가 없이 빗물만 고여있는 석물이 있다. 묘에 당사자의 비석 외에 다른 이의 비석이 있을리가 없을텐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무려 네분의 임금이 치제문비를 직접 작성하고 직접 썼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묘비 하나쯤 더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인다.
곡장 오른쪽 뒷편에는 산신제를 지냈을 것으로 보이는 석물이 있다.
제물을 올려놓았을 법한 넓직한 판석이 놓여져 있다. 어찌보면 왕릉보다 더 많은 석물들이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후대 사람들이 인평대군의 인간됨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알 수 있다.
인평대군 치제문비를 들여다보자.
인평대군치제문비는 글과 그림에 능하고 학문이 뛰어났던 인평대군이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형인 효종과 후대 왕들이 그의 인품과 업적을 치하하며 지은 비문으로 임금이 제문을 직접 짓고 쓴 어제어필 비문이다. 치제문비에는 인평대군의 생애를 비롯해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가 겪었던 고초와, 그 후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서 외교에 중책을 수행한 공적 등이 적혀있다. 제1비는 숙종 19년(1693)에 쓰고 경종 4년(1724)에 세운 것으로 전면에 효종 후면엔 숙종의 어제어필이 새겨있고, 제2비는 정조16년(1792)에 세운 것으로 상단에 영조, 하단에는 정조의 어제어필이 새겨있다. 인평대군치제문비는 조선시대 임금의 글과 글씨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소중한 유적이다(인평대군치제문비에서).
인평대군 치제문 비(麟坪大君致祭文碑)는 모두 2기로 묘역 아래 비각 안에 동서로 배치되어 있다. 서쪽 비의 앞면에는 1658년 효종 제문을 효종 어찰에서 집자(集字)하여 새기고, 뒷면에는 1693년 포천으로 무덤을 이장할 때 숙종이 어제 어필한 제문을 새겼다. 비석의 몸돌은 1693년에 제작하였다가, 1724년에 전액까지 더하여 완전한 비석으로 세웠다. 또 동쪽 비에는 위쪽으로부터 1762년과 1765년의 영조 어제 어필 제문, 1792년 정조 어제 어필 제문, 1825년 순조 어제 어필 제문 등의 순서로 새겼다. (포천시청 제공)
대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효종과 숙종 그리고 영조와 정조에 이르기까지 무려 네분의 임금이 직접 짓고 쓴 치제문비는 조선역사를 통틀어 유일하다. 게다가 한곳에서 이 모두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신기하고 귀한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인평대군의 동복 친형인 효종과의 우애깊은 일화를 살펴보자.
(사진, 서울대학교 박물관 제공)
"깊은 궁궐 속에 몸을 움츠려 살다가, 오늘 그대가 놀러간다 들었다네.
골짝에는 거문고 소리 울리고, 구름 너머 피리 소리 아득하여랴.
멀리 보매 더욱 더 마음이 장대해지고, 높이 올라 기운은 더욱 고양되려 하네.
술이 깨자 도로 다시 취했으니, 가을 녘 푸른 산에 호방한 홍치 일어나네.
상유헌."
효종이 세자시절 천마산으로 나들이가는 인평대군에게 친히 써준 어제어필이다. 이 싯구들만 읽어보아도 인평대군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깊은 궁궐 속에 몸을 움츠려 살다가'란 부분에서는 고달픈 세자의 삶을 한탄하는 모습도 보인다. 소현세자가 급서하지만 않았다면 인평대군과
함께 떠났을 나들이를 아름답게 묘사했다.
또한 효종이 사랑하는 아우 인평대군이 죽었을 때를 묘사하는 장면을 실록을 통해 살펴보자.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의 병세가 위독하므로 상이 거가(車駕)를 재촉하여 떠났는데, 집에 막 도착했으나 대군은 이미 죽었다. 상이 이에 가인(家人)의 예로 임상하더니 예관이 의주(儀註)를 뒤따라 올리자, 상이 얕은 담색옷에다 오각대를 띠고 나가서 곡(哭)하였다.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의식대로 진위(進慰)하였다. 상이 승지와 사관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이어 혼자서 상차(喪次)로 갔다."
己酉/麟坪大君㴭疾篤, 上趣駕而行, 纔及其第, 大君已卒。 上乃以家人禮臨喪, 禮官追上儀註, 上以淺淡服烏角帶, 出臨擧哀。 王世子率百官進慰如儀。 上命承旨史官毋得入, 仍獨臨喪次。
(사진과 글,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제공)
1658년 5월 13일(효종 9), 조선의 임금이 그의 아우가 죽었다고 해서 한달음에 달려가 왕실의 예법이 아닌 가인, 즉 한 집안의 예로써 초상을 치뤘다는 말이다. 또한 승지와 사관조차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홀로 상주의 처소(상차)로 임했다는 것은,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 앞에 임금의 체통도 버리고 오직 형으로서 동생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는 것으로 효종이 얼마나 인평대군을 사랑하고 아꼈는지 알 수 있다.
동생의 나들이 소식에도 시를 지어 선사할 정도로 다정다감했던 형이 그 아우의 죽음 앞에서야 말해 무엇할까.
357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의 우애깊은 인간미에 고개 숙여진다.
문화재청의 규정을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가치를 지닌 문화재라면 현재처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 유지하기 보다는 국보로 지정해서 그 역사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보다 세심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처럼 역사에 대해 조금의 관심만 가지고 있어도 이게 얼마나 귀한 문화재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문화재청 나름의 엄격한 규정과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고 지정했을 것이다. 그처럼 국보로 지정하는 것이 어렵다면 이와 같은 문화재의 가치를 널리 홍보하고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한낱 잊혀진 유물로 남지 않도록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숙제일 것이다.
재실 근처의 모습이다. 정겹다고 말해야 할지 혹은 너저분하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곳은 일반 가정집이 아니라 대군묘의 재실이란 사실이다. 다 부숴진 저 강아지의 쉼터처럼 인평대군의 묘역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편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주변을 조금만 잘 정리해준다면 여느 방문객에게도 좋은 인상을 줄 것이다.
언제나 같은 지적을 하게 된다. 바로 이곳 인평대군의 묘역도 마찬가지다. 바로 코앞까지 왔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좌측 아래 사진은 묘역 직전 진입로인데도 작은 간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어렴풋이 어느 양반집 무덤인가 싶을 정도다. 그래도 근처에 공장이 들어서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겠다.
윤관우 기자
글쓰기 평가현수랑 기자2015.11.16
우와~, 이번에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멋진 기사로군요. 직접 다녀온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드는 사진은 물론 중간 중간 일화를 통해 인평대군에 대해서는 물론 형제들의 우애에 대해서도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멋진 기사였어요. 정말 정말 잘 썼어요!!!!!
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