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나의 조선왕릉 답사기: 제2회 양주 온릉을 다녀오다 비정한 아버지의 선택 그리고 단경왕후 이야기

2015.12.10

[연속기획] 나의 조선왕릉 답사기, 제2회 온릉을 다녀오다


비정한 아버지의 선택 그리고 단경왕후 이야기


 







기자는 연속기획으로 조선왕릉 40기를 답사중입니다. 내년 1월이면 꼬박 1년 6개월째가 됩니다. 그동안 많은 능을 다녔지만 갈때마다 새로워요. 능의 주인공인 왕 혹은 왕비에 대한 치적부터 그분들의 삶에 얽힌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해 공부하다보면 마치 조선시대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예요. 게다가 직접 그 분이 잠들어 있는 능침에 올라 봉분 가까이 다가서면 왠지 가슴이 쿵쾅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합니다. 집에서 책으로만 알던 사실들이 마치 어제 일어난 것 처럼 생생하기도 하고 어떤 슬픈 사연이 있는 경우에는 마음이 아프기도 해요. 




이번에 기자가 방문한 온릉 역시 애닮은 사연을 담고 있는 단경왕후의 능입니다. 이 능은 현재 비공개릉으로서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어요. 기자의 경우에는 문화재청에 미리 정해진 절차를 통해 승인을 얻고 답사를 했답니다. 혹시라도 관심있는 분들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해당 관리소에 승인은 받아서 답사하시기 바래요. 하지만 학술조사라는 단서가 붙어있으니 혹시라도 답사목적란에 '소풍' 혹은 '그냥'이라고 쓰지는 마세요.




온릉은 폐비의 신분으로 승하한 단경왕후의 능으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위치한 사적 제210호이며 1557년(명종 12)에 조성되었어요. 1557년 127일 사저에서 71세의 나이로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 친정인 거창신씨의 가족묘역에 안장되었다가 1739(영조 15)에 복위되었어요. 이 해 328일 영조는 폐비 신씨의 시호를 단경으로 올리고, 능호를 온릉으로 추복했으며, 4월에는 온릉의 상설을 새로 설치하면서 단종의 능인 장릉을 봉릉한 예를 따르도록 하되, 정릉과 사릉의 상설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느 왕릉보다 석물의 수도 적고 봉분 주변에는 병풍석은 커녕 난간석도 없이 소박한 편입니다.


 


단경왕후는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폐비가 되었으며 어떤 계기로 가족묘역에 묻혔다가 182년만에 복위되었을까요? 그 첫 번째 단서는 중종반정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답니다.


 


중종반정. 그날의 숨막히는 행보를 실록의 입을 빌려 살펴보도록 해요.


 


"거사하기 하루 전날 저녁에 희안(希顔)이 김감(金勘김수동(金壽童)의 집에 가서 모의한 것을 갖추 고하고, 이어 박원종·유순정과 더불어 훈련원(訓鍊院)에서 회합하였다. 무사와 건장한 장수들이 호응하여 운집하였고, 유자광(柳子光구수영(具壽永운산군(雲山君)이계(李誡운수군(雲水君)이효성(李孝誠덕진군(德津君)이활()도 또한 와서 회합하였다. 여러 장수들에게 부대를 나누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뜻밖의 일에 대비하게 하였다가, 3경에 원종 등이 곧바로 창덕궁(昌德宮)으로 향하여 가다가 하마비동(下馬碑洞) 어귀에 진을 쳤다. 이에 문무 백관(文武百官)과 군민(軍民) 등이 소문을 듣고 분주히 나와 거리와 길을 메웠다. 영의정 유순(柳洵우의정 김수동(金壽童찬성 신준(申浚)과 정미수(鄭眉壽), 예조 판서 송일(宋軼병조 판서 이손(李蓀호조 판서 이계남(李季男판중추(判中樞) 박건(朴楗도승지 강혼(姜渾좌승지 한순(韓恂)도 왔다. 먼저 구수영·운산군·덕진군을 진성 대군(晉城大君) 집에 보내어, 거사한 사유를 갖추 아뢴 다음 군사를 거느리고 호위하게 하였다. 또 윤형로(尹衡老)를 경복궁(景福宮)에 보내어 대비(大妃)께 아뢰게 한 다음, 드디어 용사(勇士)를 신수근(愼守勤신수영(愼守英임사홍(任士洪) 등의 집에 나누어 보내어, 위에서 부른다 핑계하고 끌어내어 쳐죽였다......(중간 생략)......





수근은 신씨(愼氏)의 오라비이기 때문에 총애를 얻어 세력과 지위가 극히 융성하니, 권세가 한때를 휩쓸었다. 오랫동안 전조(銓曹)를 맡아 거리낌없이 방자하였으며, 뇌물이 폭주(輻湊)하여 문정(門庭)이 저자와 같았고, 조그만 원수도 남기지 않고 꼭 갚았다. 주인을 배반한 노비(奴婢)들이 다투어 와서 그에게 투탁(投托)하였으며, 호사(豪奢)를 한없이 부려 참람됨이 궁금(宮禁)에 비길 만했으니,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 마땅하다




수영은 수근의 아우이니, 또한 외척(外戚)이라는 연줄로 갑자기 요직에 올라, 총애를 믿고 제멋대로 하였다. 어떤 사람이 언문을 섞어 시사(時事)를 비방하는 내용으로 익명의 글을 지어 그의 집에 던졌다. 그가 곧 연산군에게 고발하니, 연산군이 극노(極怒)하여 죄인(罪人)의 족친(族親)이 한 것으로 여기고 신국(訊鞫)을 더욱 각심하게 했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사대부들에게 미친 화가 이로부터 더욱 참혹해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며 울분에 차서 살을 씹어 먹고자 하였다"


 


 前一日夕, 希顔詣金勘金壽童家, 具告其謀, 仍與朴元宗柳順汀會于訓鍊院, 武夫健將, 響應雲集, 柳子光具壽永雲山君誡雲水君孝誠德津君亦來會部分諸將, 各領軍士, 以備不虞夜三鼓, 元宗等直向昌德宮, 結陣於下馬碑洞口於是文武百官軍民等, 聞風奔赴, 塡街塞道領議政柳洵右議政金壽童贊成申浚鄭眉壽禮曹判書宋軼兵曹判書李蓀戶曹判書李季男判中樞朴健都承旨姜渾左承旨韓恂亦來先遣具壽永雲山君德津君于晋城大君邸, 具告擧事之由, 仍領軍侍衛又遣尹衡老于景福宮, 啓于大妃, 遂分遣勇士于愼守勤守英任士洪等家, 稱內召, 引出擊殺............守勤以愼氏之兄, 得幸, 勢位極隆, 權傾一()〕。 久典銓曺, 縱恣極忌, 賄賂輻湊, 門庭如市, 忍讎必報, 睚眦不遺叛主奴婢, 爭來設托, 窮極豪奢, 僭扶宮禁, 其及宜矣守英, 守勤之弟, 亦緣外戚, 驟陞顯要, 恃寵專恣有人作(慝名書)匿名書, 誹謗時事, 雜以謗文, 投于其家卽告于燕山, 燕山極怒, 以爲罪人族親所爲, 訊鞫尤刻, 枉死者, 不可勝數搢紳之禍, 自此益慘人皆切齒痛憤, 欲食其肉


(중종 1, 1(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 92(무인) 1번째 기사, 참고)




반정이 일어나기 직전 반정을 주도했던 박원종은 당시 우의정 강구손(姜龜孫)을 시켜 좌의정이었던 신수근을 찾아가게 합니다. 조심스럽게 반정계획을 이야기하며 함께 하기를 청했어요. 하지만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신수근은 임금이 비록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그를 믿고 살 뿐이다라며 단번에 거절했답니다. 결국 반정 당일 신수근은 그의 형제 수영· 수겸과 함께 모두 살해당합니다. 반정공신 가운데 버젓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 구수영(具壽永)의 뻔뻔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인데요. 구수영은 누굴까요? 구수영은 12세에 영응대군(永膺大君 : 세종의 여덟째 아들)의 사위로 뽑혀 온갖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됩니다. 연산군에 이르러서는 더욱 승승장구하며 갖은 아첨으로 연산군으로 하여금 흥청망청에 빠지도록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반정의 무리에 끼어 연산군을 폐하는 데 한몫을 하게 되었을까요? 중종반정이 일어난 92일 밤. 군사들이 반정을 도모하려고 광화문 앞에 집결했다는 말을 듣고는 노비를 시켜 반정군에게 융숭한 음식을 대접하였던 구수영은 숙청대상 1호에서 느닷없이 반정공신으로 탈바꿈을 하게 됩니다. 게다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제수되었으나 이후 연산군의 충복이었다는 이유로 결국은 파직되고 말죠. 사정이 이러하니 인조반정은 명분이 부족한 헛점투성이 반쪽짜리 쿠데타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신수근의 누이가 연산군의 왕비였고 그의 딸이 진성대군의 부인이었으므로 신수근은 누이와 딸의 목숨 줄을 쥔 채 상상도 못할 인생 최대의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반정에 가담하여 성공할 경우, 주군을 배신하고 누이를 죽음으로 내몬 냉혈한이 되겠지만, 국부로서의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며 살아갔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결국 연산군과 누이 신씨였어요. 그 결과 온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했어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딸 신씨만큼은 중종의 원비가 되었어요. 그러나 신씨는 신수근의 친딸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근거없는 죄목으로 정확히 7일 만에 궁에서 쫒겨나게 됩니다. 한마디로 신수근이 반정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은 물론이고 누이와 딸 모두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가문은 풍비박산이 났어요.


 


이후 지금의 온릉 근처에서 51년을 하루같이 지아비를 그리워하며 살다가 명종12년에 승하했어요. 얼마나 외롭고 억울했을까요? 당시의 상황을 명종실록을 통해 살펴보기로 해요.


 


......그러나 폐비가 무죄한 것을 생각하고 항시 불쌍하게 여기며 잊지 못하였다. 이때에 졸하자 상이 장생전 재궁(梓宮)을 특사하여 왕후의 고비(考妃)의 예에 의하여 염습을 하게 하고 1등례로 호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비()가 폐출당한 것은 본래 그의 죄가 아니었는데 모든 치상(治喪) 절차를 자못 후하게 갖추지 아니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는 마음이 있었다.


(명종 23, 12(1557 정사 / 명 가정(嘉靖) 36) 127(병술) 1번째기사


폐비 신씨의 졸기, 명종실록 참조)


 


명종 역시 폐비신씨의 억울함을 잘 알면서도 그 장례절차를 왕후의 예로 다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어요. 결국 1557년 명종 12년에 거창신씨의 묘역에 소박하게 장사지냈고 말았죠.


 


그렇다면 아무런 잘못도 없어 보이는 원비 신씨를 무슨 근거로 폐위했던 것일까요? 중종을 옹립했던 반정공신들이 왕비 신씨의 폐위를 주장하며 펼쳤던 상황을 살펴볼까요.


 


유순·김수동·유자광·박원종·유순정·성희안·김감·이손·권균·한사문·송일·박건·신준·정미수 및 육조 참판 등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거사할 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큰 일을 성취하고자 해서였습니다. 지금 수근의 친딸이 대내(大內)에 있습니다. 만약 곤궁으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지고 인심이 불안해지면 종사에 관계됨이 있으니, 은정(恩情)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아뢰는 바가 심히 마땅하지만





그러나 조강지처(糟糠之妻)인데 어찌하랴? 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신 등도 이미 요량하였지만, 종사의 대계(大計)로 볼 때 어쩌겠습니까? 머뭇거리지 마시고 쾌히 결단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종사가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 의논을 좇아 밖으로 내치겠다 하였다



얼마 뒤에 전교하기를, “속히 하성위(河城尉)정현조(鄭顯祖)의 집을 수리하고 소제하라. 오늘 저녁에 옮겨 나가게 하리라.”하였다.


柳洵金壽童柳子光朴元宗柳順汀成希顔金勘李蓀權鈞韓斯文宋軼朴楗申浚鄭盾壽及六曹參判等, 同辭以啓曰: “擧事時, 先除愼守勤者欲成大事也今者守勤親女, 方在于內若正位宮壼, 則人心危疑, 人心危疑, 則有關宗社, 請割恩出外傳曰: “所啓甚當, 然糟糠之妻, 何以爲之?” 僉啓曰: “臣等亦已料之矣, 於宗社大計何如? 請快決無留傳曰: “宗社至重, 何計私情? 當從群議出外未幾, 傳曰: “其速修掃河城尉鄭顯祖家今夕當移出也


(중종 1, 1(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 99(을유) 2번째기사)


 







부인 신씨를 폐위시키라는 반정공신들의 강압에 한 나라의 임금이자 신씨의 지아비인 중종이 보인 저항이라고는 조강지처라는 한마디 말뿐이었어요. 반정 전에는 이복형 연산군 때문에, 이제 반정에 성공하고 나서는 반정공신들의 위세에 눌린 중종은 자기 입으로 조강지처라고 했던 부인 신씨를 그날 밤 조금도 지체없이 출궁시키고 말았어요



겉으로는 종묘사직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지만 명색이 왕인 중종은 제 부인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형편이었어요. 그때 단경왕후가 20세였으니 돌아가시는 71세까지 무려 51년을 중종만 바라보다 외롭게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명종부터 시작된 폐비신씨의 복위문제는 1698년 숙종 때 다시 논의되었어요.


 


......그리고 신씨(愼氏)를 복위(復位)시키는 일에 이르러서도 역시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당초에 신씨를 내쫓은 것은 비록 중종의 뜻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나 이미 중중의 명으로 폐출(廢黜)된 것입니다.......그러나 중종께서 일찍이 처분을 내리지 않으시고, 승하(昇遐)하신 지 지금 이미 1백여 년이 지났습니다......춘추(春秋)에서 선공(先公)의 부인(夫人)에 있어서는 비록 마땅히 관계를 끊어야 할 큰 죄라 하더라도, 감히 위호(位號)를 깎아내릴 수가 없어서 모두 소군(小君)이라고 기록한다.’ 하였는데





이는 곧 신자(臣子)가 군친(君親)의 존위(尊位)에 대해서는 감히 스스로 높여주고 깎아내리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도리입니다




큰 죄가 있는데도 감히 마음대로 깎아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크게 억울함이 있어도 감히 마음대로 높여줄 수가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숙종 32, 24(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 1024(을축) 3번째 기사, 참고)


 


참으로 이상한 논리죠? 춘추에서 말하길, 왕후는 아무리 큰 죄가 있어도 그 벼슬이나 지위를 깎아내릴 수 없으니 그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는 것인데요. 다시 말해서 왕후가 이런저런 이유로 폐비되었다면 제 아무리 억울함이 있다할지라도 그 억울함을 함부로 풀어줄 수 없으니 불가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숙종임금 시절에 와서도 논의만 있었을 뿐, 그 억울함은 풀어질 길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폐비신씨가 죽은 지 182년 만인 영조 15(1739) 328일에 이르러서야 폐비신씨는 단경왕후라는 시호와 온릉의 능호를 받게 되었어요. 그 엄숙했던 상황을 영조실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시임·원임 대신과 관각(館閣)의 당상과 육조(六曹)의 참판 이상을 명초(命招)하여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게 하여


 



신비의 시호를 단경(端敬)()를 지키고 의()를 지키는 것을 단()이라 하고,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공경하고 조심하는 것을 경()이라 한다.이라 올리고, 휘호(徽號)를 공소순열(恭昭順烈)게을리하지 않아서 덕이 있는 것을 공()이라 하고, 덕을 밝혀서 배움이 있는 것을 소()라 하고, 도리에 화합하는 것을 순()이라 하고, 덕을 지키고 사업을 높이는 것을 열()이라 한다.이라 올리고, 능호(陵號)를 온릉(溫陵)이라 하고




봉릉 도감(封陵都監)을 설치하고 무인년(1698, 숙종24) 장릉(莊陵)을 추복할 때의 예에 따라 이달 30일에 태묘에 고하라고 명하였다.


 甲戌/命招時原任大臣館閣堂上六曹參判以上, 會賓廳, 議上愼妃謚號端敬。【守禮執義曰端, 夙夜儆戒曰敬。】上徽號恭昭順烈。【不解爲德曰恭, 明德有勞曰昭, 和比于理曰順, 秉德尊業曰烈。】陵號曰溫陵, 設封陵都監, 依戊寅復莊陵例, 命以今月三十日告太廟



(영조 49, 15(1739 기미 / 청 건륭(乾隆) 4) 328(갑술) 1번째기사)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당연히 당시에 폐비를 주장했던 자들에 대한 적대적 논의도 뒤따르게 되었겠죠? 연이은 피의 복수가 따를 것처럼 보였어요. 


 


교리 홍계유(洪啓裕)가 상소하기를,


단경왕후(瑞敬王后)께서 이미 복위되고 부묘되셨으니, 도리에 어그러지는 논의를 주장한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같은 사람은 중묘 정향(中廟庭享)에서 내쳐야 하겠습니다.”


(영조 49, 15(1739 기미 / 청 건륭(乾隆) 4) 424(경자) 2번째 기사, 참고)


 


하지만 피의 복수는 또 다른 피를 부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영조는 실제로 이 사람들을 내치진 않았어요. 다만 단경왕후의 억울함을 모두가 애통해했다는 것은 알 수 있어요.


 


중종반정 이후 신씨가 폐위된 날부터 단경왕후로 복위되고 부묘에 이르는 거의 모든 사건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박원종(朴元宗)입니다.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의 처남인 박원종은 성종대와 연산군대에 승승장구하던 인물이었어요. 실록에 보면 연산군이 월산대군 박씨에게 쌀과 콩 그리고 면포와 정포를 모두 14번이나 하사하고 그 어떤 경우에도 박씨만은 보호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와 관련된 기사들을 일일이 찾아보았습니다. 


 


연산 345820(정미) 6번째기사 / 월산 대군의 처 박씨에게 쌀··면포 등을 내리다


연산 386811(계사) 2번째기사 / 월산 대군 부인 박씨에게 쌀 면포 등의 물품을 내리다


연산 417912(정해) 1번째기사 / 면포 등을 월산 대군의 처 박씨에게 내려 주다


연산 438414(을묘) 2번째기사 / 월산 대군의 아내 박씨에게 쌀 50섬 등을 하사하다


연산 468915(갑신) 3번째기사 / 월산 대군 박씨에게 면포 등을 내려주다


연산 521018(경오) 1번째기사 / 월산 대군 이정의 아내 박씨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연산 5711410(을축) 1번째기사 / 월산 대군의 아내 박씨에게 여러 물품을 하사하다


연산 5811612(을축) 6번째기사 / 월산 대군 부인 박씨에게 면포·정포 각 150필을 내리다


연산 6112111(신묘) 4번째기사 / 월산 대군의 처 박씨에게 쌀 50석을 내리다


연산 6112214(갑자) 10번째기사 / 자순 왕대비 등에게 노비를 내리다


연산 6212413(임술) 5번째기사 / 월산 대군의 부인 박씨에게 쌀을 하사하다


연산 621269(정사) 3번째기사 / 절부·효부를 정려하는 전교를 하다


연산 6212613(신유) 1번째기사 / 월산 대군의 아내를 불러 책문과 호를 주다


연산 631271(무인) 18번째기사 / 월산 대군의 아내 박씨에게 물품을 하사하다(조선왕조실록 제공)


 


이 기사들만 보더라도 연산군이 박씨부인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어요. 이처럼 박원종은 누나 덕에 1506(연산 12) 6월에 종1품의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고 온갖 권력과 부를 누리며 살았어요. 그러다 그해 720일 박씨부인이 돌아가시자마자 채 2개월도 되지 않아 연산군 축출에 발벗고 나섰던 인물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네요. 어찌 보면 본인의 능력이 아니라 누나 박씨의 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박원종이 누이가 죽음으로써 닥칠 원한어린 시련들을 연산군 축출이라는 카드로 맞섰던 게 아닐까요? 이 인물에 관해서는 정릉에 관한 기사에서 자세히 다뤄야겠습니다.


 


영조는 온릉을 조성함에 있어서 경기 감사(京畿監司) 서종옥(徐宗玉)을 인견한 자리에서 1735819일에 온릉에 갈테니 주위 백성들이 번거롭지 않도록 너무 넓게 길을 닦지 말라고 명했어요(영조 50, 15(1739 기미 / 청 건륭(乾隆) 4) 88(임오) 1번째기사 참고). 실제로 영조15819일에 친히 온릉으로 나아갔다. 백성들에게 최대한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인자한 마음은 정조랑 많이 닮았습니다. 정조 역시도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용복면 화산으로 천장할 때 화성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도록 내탕금을 내려 땅값을 후하게 쳐주고 새집을 지을 자금까지 넉넉하게 주었다고 해요.


 


임금이 온릉(溫陵)에 나아갔다.....일출(日出) 때에 거가(車駕)가 능소(陵所)에 이르러 삼헌(三獻)을 행하였다. 예가 끝나고서 임금이 재랑(齋郞) 신후팽(愼後彭)에게 묻기를,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의 묘소는 어디에 있는가?”......회란(回鑾)한 뒤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라고 명하였다(영조 50, 15(1739 기미 / 청 건륭(乾隆) 4) 819(계사) 1번째 기사)


 


여기서 익창부원군이란 바로 단경왕후의 아버지인 신수군을 이르는 말이에요. 왕후가 돌아가신지 182년만에 복위하시고 직접 온릉으로 나아가 삼헌을 올리면서도 그 왕후의 아버지인 익창부원군의 묘소에도 예를 다하고자 한 영조의 마음이 무척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예와 의리를 지켜() 공경을 다하니() 어찌 따뜻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단경왕후의 시호와 온릉(溫陵)이라는 능호를 내리셨는지도 모르겠어요. 이후 영조는 온릉의 기일에는 육선을 멀리하고 소식을 하시며 단경왕후를 영혼을 달래셨다고 합니다.


 


이런 사정을 알고 나니, 사도세자의 일로 인해 씌워져 있던 영조의 고집스럽고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냉혈한의 이미지가 많이 수그러지는 것 같아요. 영조임금의 보살핌과 배려로 평생을 원망과 억울함에 가슴치다 돌아가신 단경왕후의 넋도 많이 달래졌으리라 생각하니 뭉클해졌습니다.


 


그럼 사진을 통해서 온릉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로 해요. 


 



다른 왕릉에 비해 길목마다 표지판이 많아 찾아가기 쉬운 편이었어요. 특히 온릉 바로 앞의 이 커다란 안내판은 맘에 쏙 들어요. 비공개릉임을 알리는 알림판.





왈왈이라 이름 붙인 이 귀여운 녀석은 시종일관 우리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왈왈" 짖어댔어요. 비공개릉이라 오랜만에 보는 낯선 사람들이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을 겁니다. 다음에 올 때는 개껌이라도 챙겨와야겠어요. 그런데 참 신기한 점은 기자가 홍살문 쪽으로 접어들자마자 갑자기 조용히 앉아 있는 거에요. 왕릉을 지키며 사는 왈왈이는 참배의 의미를 아는 것일까요?







온릉으로 진입하는 산책로. 아무도 없는 비공개릉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렙니다.










재실의 모습. 능 상설에 따르자면 재실은 능에서 대략 300미터 정도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 재실도 원래 있던 자리에 도로가 나면서 지금의 온릉 바로 50여 미터 옆으로 옮겨온 것인데 원래는 ㅁ자였다고 해요. 단촐하지만 고즈넉한 모습이 정겨웠어요. 





1970년에 확장된 도로의 모습이다. 이 도로 어딘가에 재실의 원형이 있었을 것에요. 지하도나 고가도로를 낼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정부는 그것보다는 손쉽게 재실을 뜯어 옮기는 경제적인 선택을 했어요. 그나마 온전히 이전하지도 않았어요. 정확히 말해서 뜯다 남은 재목 중 쓸만한 것들만 골라 자그맣게 지었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겁니다. 영조는 온릉의 조성을 명하고(영조 15년, 1739) 단경왕후를 이장한 뒤, 바로 이 재실에 머무르며 첫번째 제사를 준비했을탠데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재실의 대청마루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테이블이 있고 그 앞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인증서가 붙어있어요. 처음보는 것이라 한참을 들여다 보았어요. 하지만 무슨 '왕릉등록증'도 아니고 제향 테이블에 축문인양 매달려 있는 인증서가 썩 어울리지는 않았어요.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란 사실은 이미 너무 유명하지 않나요?







그래도 좀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흐뭇하다. 어쩌면 걸어 둘 가치가 충분할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기준을 보면,


 


기준 () : 유교 문화의 맥락에서, 조선왕릉은 자연 및 우주와의 통일이라는 독특하고 의미 있는 장례 전통에 입각해 있다. 풍수지리의 원리를 적용하고 자연경관을 유지함으로서 제례를 위한 기억에 남을 만한 경건한 장소가 창조되었다.


 


기준 () : 조선왕릉은 건축의 조화로운 총체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로, 한국과 동아시아 무덤 발전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 준다. 왕릉은 특별한 (또한 규범화된) 건축물, 구조물 요소들의 배치를 보여 준다. 그리고 몇 세기에 걸친 전통을 표현하는 동시에 보강한다. 또한 미리 정해진 일련의 예식을 통한 제례의 생생한 실천을 보여 준다.


 


기준 () : 조선왕릉은 규범화된 의식을 통한 제례의 살아 있는 전통과 직접 관련된다. 조선 시대에 국가의 제사는 정기적으로 행해졌으며, 지난 세기의 정치적 혼란기를 제외하고 오늘날까지 왕실 및 제례 단체에 의해 매년 행해져 왔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왕릉은 전 인류를 위해서 보호되어야 할 문화적이고 자연적인 재산의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인정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겠다는 말이다. 결국 재실 벽에 붙어 있는 저 인증서는 자랑할만한 것이니 계속 걸어두는 게 좋겠다.







사적 제210호 온릉의 표지석. 뒷면에는 대한민국 1970년 5월 26일이라고 조각되어 있어요







재실 바로 옆에 있는 관리사무소의 모습. 비교적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어요.







보통은 이 세계유산 표지석은 왕릉 입구에 있기 마련인데, 온릉의 경우에는 입구가 너무 좁고 바로 차도라 홍살문 바로 옆에 조성했네요.





재실이 있던 곳에 도로가 나지만 않았더라면 다른 왕릉처럼 제대로 상설할 수 있었을텐데 아쉬운 부분이에요. 도로는 얼마든지 새로 낼 수 있지만, 사라진 문화재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왕릉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어요. 왜냐하면 적어도 조선왕릉의 경우는 세계유산에 등재 전과 등재 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죠. 실제로 조선왕릉관리소가 탄생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된 것도 그것을 계기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2009630, 당시 조선왕릉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온 힘을 모아준 모든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온릉의 대한 설명문이 적힌 안내판. 그 어떤 왕릉 안내판보다 간략하게 적혀 있어 오히려 더 궁금해져요. 단경왕후는 어떤 분이셨을까? 왕릉답사를 하다보면 해당 인물과 인터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스티커 한장으로 덮으려던 얕은 꾀는 참배객들의 손톱으로 응징받았다.




지난 번 이항복선생의 화산서원을 취재했을 때도 같은 지적을 하였어요. 경기문화재도 그러한데 사적이야 말할 나위가 없을 겁니다. 애초에 간판을 의뢰할 때, 문화재청 담당자가 거창신씨(居昌愼氏)인 신수근(愼守勤)의 성을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온전히 안내판 제작자의 실수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에요. 물론 안내판 제작자가 옥편을 뒤져서 굳이 다른 한자로 바꿨을 것 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타가 인쇄되었다면 마땅히 새로 제작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 저렇게 조잡하게 스티커 하나 달랑 붙여둔다는 것은 너무나 성의없고 무책임해 보입니다. 무슨 오타가 있었는지 궁금해 기어이 스티커를 떼서 확인하려고 했던 참배객에겐 크게 질타하고 싶지 않습니다. 시대에 걸맞는 말은 아니지만, 조선왕릉이 조선의 왕과 왕비 무덤을 말하는 것이라면 분명히 부적절한 조치라고 말하고 싶어요. 국민들에게 기금을 후원받아서라도 새롭게 단장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봅니다.







홍살문에서 바로 본 정자각과 우측의 수복방 터와 비각. 저 뒷편의 주산에 걸린 구름이 한가로워 보입니다.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판위. 판위는 왕이 능역에 들어서면서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네번 절을 하는 공간입니다.





실제로 임금이 절을 할때는 판위 위에 푹신한 솜이불은 아닐지라도 얇고 붉은 비단 같은 것을 깔지 않았을까요? 단경왕후께서는 영조 15(1739)에 왕후로 복위되어 현재의 온릉으로 이장되었어요.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76년 전, 저 판위에 가장 먼저 네번의 절을 한 분은 분명히 영조임금이었을 겁니다. 까다로운 영조임금이 지금처럼 울퉁불퉁 깨진 판위를 보았다면 그 즉시 능참봉은 귀향길에 올랐겠죠? 이런 재밌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 게 바로 왕릉답사의 묘미가 아닐까 해요. 한편 인정 많고 눈물 많은 영조임금이 저 판위 위에서 얼마나 울었을까요? 이런 상상을 하면 어찌 그리 사도세자에게만은 모질게 대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다음에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가 계신 원릉을 답사할 때 조금 깊이 있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왼쪽이 향로로서 돌아가신 왕의 혼령이 지나다니는 길이고 오른쪽 어로는 제사를 드리는 왕이 다니는 길입니다. 돌아가신 선왕을 기리는 효성이 이 작은 돌길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수복방의 터. 주춧돌이 대부분 남아있어요. 수복방은 왕릉을 관리하는 관리가 머무는 건물입니다.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에는 부엌 겸 아궁이가 있고 가운데가 머무는 방, 그리고 맨 왼쪽이 대청마루로 보입니다.







이처럼 깨끗하게 단장된 정자각은 처음 보았어요. 말끔한 모습이 마치 장례를 치른 지 얼마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서인지 마치 조선시대에 와 있는 것 같은 행복한 착각을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정자각의 처마 위에 당연히 올라 서 있어야 할 어처구니 잡상들이 보이지 않네요. 어찌된 일일까요?


 


"어처구니가 없네요?"




아마 원래의 정자각에 있던 어처구니들을 보수하는 중이거나 문헌을 고증하여 새롭게 제작하는 중일지도 모르겠어요. 다음에 다루겠지만, 어처구니는 궁궐이나 왕릉의 전각의 처마 위에 있는 잡상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근데 놀랍게도 이 잡상들의 출처가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나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라고 해요.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어요. 어처구니 잡상이 유난히 멋진 왕릉을 취재할 때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단청작업으로 다시 태어난 온릉의 정자각의 모습입니다. 실제로 보면 너무 예뻐요.





윗쪽 사진은 정자각에서 제례를 지낸 뒤, 산자는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죽은 자는 정자각의 정전을 통과해서 능침공간으로 가는데 이때 능침으로 올라가기 전에 지나가는 다리입니다. 한마디로 혼령 전용 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정자각 뒤편 서쪽에 있는 축문을 소각시키는 예감이라는 석조물(왼편), 정자각 뒷편 동북쪽에는 정사각형의 산신석(오른편)을 두어 산을 주관하는 신에게 예를 올리는 곳입니다.. 예감은 삐뚤하고 산식석은 어김없이 파손되어 있어요. 





이것은 왕과 왕후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비각입니다. 







단경왕후 신도비의 전경. 이것은 분명한 총탄으로 보입니다. 아마 6.25 전쟁 시에 입은 흔적이겠죠?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는데요 그나마 '조선국단경왕후온릉' 가운데 '후'자만 손상되었을 뿐 나머지 글씨는 온전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불행중 다행한 일이에요.





왜 하필이면 왕릉에서 총을 쏘았을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라면 몰라도 같은 민족끼리 싸우면서 어찌 이토록 외면했을까요? 그래도 교묘하게 글씨만은 피했으니 다행입니다.







비문의 뒷면. 왼쪽을 상단, 오른쪽을 하단으로 이어서 읽으면 됩니다. 




비신의 전면에 "조선국단경왕후온릉"의 비문이 있고, 후면에 "공소준열단경왕후신씨"의 탄생과 책봉 퇴위 및 약력을 음각하였는데 "숭정기원후 1810 정묘 사월 일립"의 비문으로 보아 순조 7(1807)에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http://tour.yangju.go.kr/site/tour/sub.do?Key=538, 자료제공).





정자각을 뒤로 하고 능상에 올라가면 이내 능침이 보여야 하는데 꽤 먼 곳에 능침이 자리하고 있었어요. 능상에 오른 후 좌측부터 능침에 이르기까지 얼추 삼십보는 걸어야 했습니다. 이 또한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궁금했어요.





좌우 문인석의 앞뒤 모습. 기자는 요즘 왕릉의 석물들에 피어있는 고착지의류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실제로 산릉도감에 나와있듯이, 강화도 석모도 부근의 화강암을 샘플링해서 기자의 실험실에서 고착지의류가 생성되는 과정과 원인을 재현해보려고 합니다. 이 실험은 이후에 가설단계부터 실험의 진행과정까지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좌측의 문인상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를 보이고 있어요. 다만 다른 왕릉과는 달리 석상이 놓인 바닥이 지면보다 낮게 패어있었어요. 다른 곳의 경우도 패어있지만 이곳 온릉의 경우는 조금 더 심한 것 같았어요. 빗물 때문에 지면이 내려앉은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온릉의 모든 석물들 밑부분이 저렇게 조성되어 있었는데요 비가 오면 고임 현상이 발생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인지 사진을 자세히 보면 문인석이 약간 북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자가 틀렸기를 바랍니다. 우측의 문인석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어요. 앞에서 볼때는 그 차이를 몰랐는데 뒷면 사진을 보니 확실히 기울어져 있어요. 또한 뒷면에는 고착지의류로 인한 피해도 심각해보입니다. 게다가 이 문인석의 왼쪽 볼 부분은 왕창 떨어진 상태입니다. 좀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6.25 전쟁 때 총탄에 맞아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왼쪽 눈 부위는 고착지의류가 심하게 피어있어서 멀리서 보면 선글래스를 끼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안타까웠어요.






가까이서 살펴 본 문인석의 얼굴입니다. 안타깝지만, 저런 부위는 어설프게 충전물을 채운다거나 보수하려다가는 원형의 모습을 잃게 될 겁니다. 아쉽지만 더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존하는 것이 최선으로 보입니다. 아마 기자의 생각에 이곳 온릉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석물의 상태만으로도 공개하기는 이를 것 같아요. 





좌측의 석마의 모습. 지금까지 본 석마 중 가장 큰 손상을 가진 석마였어요. 주둥이의 상당 부분이 떨어져 나갔는데요 총탄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복구할 엄두도 못낼 형편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안타깝지만 온릉은 당분간은 이대로 보존될 필요가 있습니다. 벌건 대낮에도 정자각에 판박이를 붙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인펜으로 이름을 적어대는 친구들을 생각한다면 일반인에게 공개하기엔 아직 무리라고 생각해요.





봉분을 바라보고 섰을 때, 우측의 망주석.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 세호의 모습이 꽤 섬세하고 세련된 모습이에요. 또한 주변의 다른 석물에 비해 고착지의류도 적게 피어있습니다. 봉분을 바라보고 섰을 때, 좌측의 망주석. 우측과는 반대로 머리를 위로 향해 있는 세호의 모습이 재밌네요. 석재의 차이는 없어 보이는데 우측의 그것에 비해 훨씬 조잡합니다. 마치 우측에서 기어내려온 석호가 좌측의 망주석 기둥으로 재빨리 기어올라가는 모습입니다. 아마 두명의 석공들이 야심차게 기획한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자가 제일 좋아하는 석호의 모습. 민화에서 보던 호랑이의 모습을 꼬옥 닮았어요. 날카로워 보이는 저 발톱조차도 귀엽기만 해요. 옆구리로 말려 올라간 꼬리는 같이 놀자고 애교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석양은 석호와는 달리 서 있는 모습인데, 뿔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했어요. 석양은 언뜻 산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좌우 석물의 위치를 가지고 재밌는 비교를 해보았어요.




석마와 문인석 그리고 망주석 세 가지 석물을 한쌍으로 하여 좌우 비교를 해보았더니 생각보다 크기와 위치가 딱 일치하지는 않았어요. 이런 정도라면 토목기술은 커녕 긴 실오라기 하나만 있었더라도 가능했을 일입니다. 조선시대가 이룬 엄청난 과학적 성과를 생각한다면, 이런 사소한 것들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가 없어요. 아마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지반이 빗물에 쓸려 석물들의 위치 역시 밀린 것 같습니다. 


 



좌측의 석마가 우측의 석마보다 한 체급 높아 보이고 좌측의 문인석이 우측의 그것에 비해 역시 한 체급 높아 보여요. 망주석은 거의 비슷해보이지만 석질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조각기술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측의 세호가 훨씬 세련되고 정교합니다. 의미없는 비교일 수도 있지만, 이런 단순한 비교만으로도 석물은 여러 사람이 각각 조금씩은 다른 석재를 사용하여 조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혼유석 아래를 받치고 있는 고석은 모두 네개이고, 각 고석마다 네개의 귀면으로 되어 있으니 총 16개의 귀면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아직 자세한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거의 2~3가지 종류인 것으로 보이는데요 모양은 물론이고 크기면에서도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6개의 귀면들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두 3가지의 모습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어요. 





봉분에 비해서 유난히 커보이는 혼유석과 고석들. 하지만 아무리 복위된 능이라 하더라도 난간석마저 없으니 너무 허전한 느낌이에요. 당시 영조대왕께서 조금만 예산을 더 내어주셨더라면 좋았을텐데요. 아쉽습니다.  





장벽의 균열은 물론이고 주춧돌까지 벌어진 상태이니 보수작업이 쉽지는 않아 보여요. 수백년 된 문화재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한 채 보수하고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게다가 과학적이어야 하는지 조금은 가늠이 됩니다. 아래 정자각과 비각을 단장한 것으로 보아 이 곡장들도 봄이 오면 정비를 할 것으로 예상해 봅니다. 





장명등의 전면에도 총탄의 흔적이 뚜렷하네요. 대석에 있는 모란꽃의 문양이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엉뚱한 관찰이겠지만, 장명등의 저 구멍으로 양쪽의 문인석과 아래 정자각을 보면 좌우측 대칭은 물론이고 정자각도 한가운데에 들어오지 않아요. 뭔가 저런 사소한 것 하나라도 딱 맞춰서 조성했을 것 같은데 의외입니다. 산릉도감이라도 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국역본이 없어서 알길이 없습니다. 역사공부=한문공부라는 등식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곡장 뒷편 둔턱에서 내려다 본 온릉의 모습. 누런 잔디가 따갑도록 내리는 햇살을 만나니 황금물결을 이룹니다.





취재를 마치고 능상을 내려오는데 햇살이 얼마나 좋던지 파노라마 샷으로 담아보았어요. 한 많았던 단경왕후께서 잘가라고 인자하게 웃으시며 손짓해주시는 것 같았어요.




온릉에 대한 역사적 정보가 부족해서 이것저것 공부하다 보니 어느새 성종, 연산군, 중종반정에서 명종, 숙종, 영조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기에 걸쳐 얽힌 사실들을 하나씩 알게 되었어요. 또 그렇게 알게 된 역사적 사실들은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찾아 참고해보았는데 힘든 작업이었지만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 가운데에는 사관들의 객관적이고 냉철한 평도 적혀있어요. 이것은 당시의 뒤얽힌 정치적 상황을 사관이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실록이 이러한데 승정원일기는 얼마나 적나라할까 싶어 호기심이 날로 늘어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읽기 쉬운 해서가 아니라 흘림글씨인 초서로 쓰여진 승정원 일기는 아직도 번역중이라고 합니다. 20019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승정원 일기는 1623년 인조1년의 기록부터 1910년 순종 4년까지의 기록만이 존재해요.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을 통해 상당부분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니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3243권의 방대한 양이 장차 완역이 된다면 조선역사의 흩어지고 찢어진 조각들을 짜맞추는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모쪼록 전문가들에 의한 국역작업이 속도를 내서 하루라도 빨리 조선의 역사를 이면까지 낱낱이 알고 싶습니다




윤관우 기자

글쓰기 평가현수랑 기자2015.12.15

우와~! 이번 기사 역시 입이 떨 벌어지는 기사로군요. 너무 자세해서 계속 놀라게만 됩니다.

다만 <단경왕후는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폐비가 되었으며 어떤 계기로 가족묘역에 묻혔다가 182년만에 복위되었을까요?> 아래에 이어지는 부분이 길어서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인 것 같아요. 길게 설명을 하기 전에 간략하게 <단경왕후는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의 비이다. 중종반정으로 왕후가 되었으나 아버지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중종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반정추진파(反正推進派)에 의하여 살해당하였고, 폐위되었다가 영조 때 복위되었다.>와 같은 설명이 나오고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사 중간에 마크들이 있는데, 간혹 블로그의 글을 가져오다가 발생하는 듯 해요. 이 부분은 제가 수정해서 기사 업로드 하도록 할게요 ^^

기사를 읽으면서 이 많은 자료들을 정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돼요. 정말 고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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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왕릉은 아직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데 신기하네요.
우왕
why the josion is brok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