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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받고 사형당한 '최초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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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윤재원 기자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영국의 찰스 1세를 아시나요? 제임스 1세와 덴마크 공주 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612년 형 헨리가 죽자 황태자가 되었으며, 1625년에 왕위에 오르고 프랑스 공주 앙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했습니다.
찰스 1세는 ‘왕권은 신이 내려주신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믿어 프랑스처럼 절대 왕권으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답니다.
그럼 지금부터 찰스 1세가 사형을 받게 된 계기와 그 이후의 과정을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638년,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어느 날,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발끈했습니다. 왜냐하면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교회에 잉글랜드의 기도책을 사용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총회에서는 찰스 1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를 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1639년 잉글랜드 군대를 소집해 국경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군대는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금이 부족해 무기를 비롯하여 전쟁을 치를 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진격을 포기하고 스코틀랜드와 강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에 그는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찰스 1세는 다시 쳐들어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자금을 마련해 병력을 늘려야 했습니다.
자금을 마련하려면 의회를 열어 의원들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1629년 의회를 해산한
이래 11년 동안 한번도 의회를 열지 않았습니다. 의회를 거치지 않고 국민들에게 온갖 세금을 거두어들였으며,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들은 감옥에 가두거나 재산을 압류했습니다.
잉글랜드에는 13세기부터 시작된 의회 제도가 있었습니다. 의회는 상원과 하원 의원들로 이루어졌고,
법을 만들거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자기 맘대로 나라를 다스리고 싶어 하는 왕들은 번번이 의회와 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는 ‘왕권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으므로 법 위에 존재한다. 왕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으며,
백성들은 왕을 절대로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을 ‘왕권신수설’이라고 합니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믿고 절대 왕권으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자마자 의회의 승인 없이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마구 거두어들였습니다.
의회에서는 찰스 1세의 왕권 행사를 그대로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628년 왕에게 ‘권리 청원’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권리 청원은 왕에세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거두지 말 것, 집주인의 허락 없이 군인들을 민가에 머무르게 하지 말 것.
평화 시에는 계엄령을 선포하지 말 것.’등 네 가지 요구 조건이었습니다.
찰스 1세는 마지못해 권리 청원을 승인했는데, 의회와 약속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듬해에 의회를 해산하고 예전처럼 제멋대로 나라를 다스린 것이었습니다.
이후 11년이 지난 1640년 4월 13일, 찰스 1세는 다시 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의원들은 전쟁을 하려면 엄청난 돈이 있어야 하고 국가재정도 어려운데 왜 쓸데없이 그런 일에 돈을 낭비하냐고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찰스 1세는 의원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자 또 의회를 해산해 버렸습니다.
이번 의회는 3주 만에 문을 닫았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단기 의회’라 부른답니다.
찰스 1세는 전쟁 자금 마련에 실패했지만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 군사를 일으켜 소코틀랜드 군대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스코틀랜드 군대는 예상보다 강했습니다.
잉글랜드 군대를 잇달아 물리쳤으며, 노섬벌랜드와 더럼 지역 전부를 점령했습니다. 찰스 1세는 당황했습니다.
전쟁을 오래 끌다가는 나라 전체가 스코틀랜드의 손아귀에 들어갈 판이었습니다.
찰스 1세는 허둥지둥 스코틀랜드와 휴전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게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주기로 하고 강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배상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별수 없이 의회를 소집하여 돈을 달라고 호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640년 11월 의회가 열렸습니다. 의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며 왕에게 의회는 3년에 한번씩 열리도록 법으로 정해야 하고
의원들의 승인 없이 국왕이 의회를 해산할 수 없다는 법도 통과시켜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찰스 1세는 의원들의 눈치를 봐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의원들은 찰스 1세의 심복 신하인 스트래퍼드 백작을 반역죄로 체포했습니다.
찰스 1세는 나라가 안정을 되찾길 원하기 때문에 의원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찰스 1세의 왕비 앙리에타는 가톨릭교도인데,
존 핌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왕비를 탄핵하려고 했습니다.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왕비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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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크롬웰
1642년 1월 4일 찰스 1세는 존 핌 등 여섯 명의 의원을 체포하녀고 군대를 이글고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눈치는 채고 모두 달아난 뒤였습니다. 찰스 1세와 의뢰는 이제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와 찰스 1세를 반대하는 ‘의회파’로 나뉘어 팽팽히 맞섰습니다.
찰스 1세와 의회의 대립으로 잉글랜드에서 내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처음 2년 동안은 왕당파 군대가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의회파 군대에는 뛰어난 장군이 올리버 크롬웰이 있었습니다. 크롬웰은 기병대를 만들었는데,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고 ‘철기대’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 후 전세는 의회파의 승리로 기울었으며,
왕당파의 군대는 1646년에야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포로로 잡힌 찰스 1세는 반란죄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1649년 1월 8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특별 법정에서는 공소장이 만들어졌고, 공소장에는 ‘찰스 스튜어트는 법에 의해 이 나라를 통치하도록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
그러나 그는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무너뜨리고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에 찰스 스튜어트는 반란죄, 살인죄, 약탈죄, 파괴죄 등을 저질렀다.’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1월 20일 토요일 오후, 마침내 찰스 왕에 대한 재판이 열렸습니다. 찰스 1세는 법정에서도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여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사흘 뒤에 찰스 1세의 공개 처형이 이루어졌습니다.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 왕은 그가 최초였습니다. 이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고, 다른 나라에도 유사한 형태로 퍼져 나갔습니다. 나중에 프랑스의 루이 16세 또한 프랑스 혁명 중 의회 표결로 처형되는 사건이 생겼으니 말입니다.
이상으로 이 기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쓰기 평가어린이과학동아 기자2021.04.14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 최초의 왕, 영국의 찰스 1세에 대한 글 잘 봤어요. 구체적인 주제에, 흥미로운 내용인데요. 역사적인 이야기를 좀 길게 쓴 느낌이 들어요. 조금 더 내용을 간추려서 글을 완성하면 좋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