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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나의 조선왕릉 답사기, 제4회 파주 삼릉을 다녀오다 제1편 공릉: 온순하고 너그러우며 아름답고 어질고 자혜로운 장순왕후 이야기
3월 20일. 햇살 좋은 일요일 오전에 파주삼릉으로 오랜만에 답사를 떠났다. 이제 따뜻한 봄날이 왔으니 더 이상 망설일 까닭이 없다. 한 달에 적어도 두 번은 나서리라 맘먹었다. 이제는 오히려 더워지기 전에 부지런히 서둘러야겠다는 마음이다.
이번 답사는 호지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더 뜻 깊었다. 매번 호수공원과 정발산 근처만 맴돌다가 소풍 가듯 왕릉에 오니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아마 좋은 사람들과 함께여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올해는 예정했던 왕릉 답사를 모두 마쳐야 한다. 그간 정리된 원고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이후 출판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아빠와 떠나는 왕릉답사"는 마무리할 예정이다.
현재 김포 장릉을 제외한 서부지구 왕릉은 모두 답사를 마친 상태이다. 서부지구에는 유난히 비공개 왕릉이 많은데 이곳도 모두 다녀왔다. 중부지구와 동부지구는 거의 다녀보지 못했으나 오히려 가장 멀리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과 청령포는 다녀왔다. 우리 답사의 취지를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고 방문과 촬영을 기꺼이 허락해주신 관계자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없는 시간이지만 잘 쪼개서 열심히 다니다 보면 어쩌면 2016년이 다 가기 전에 미션을 완성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왕릉 답사는 단순히 답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전에 해당 왕릉의 주인공들에 얽힌 역사적 조사는 물론이고 상설의 특징을 다른 왕릉의 것과 비교하고 촬영한 사진들까지 정리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든다.
힘들고 까다로운 일이지만 꼼꼼하게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주인공의 사연에 동화되어 우울해지기도 하고 눈물 짓는 경우도 있다. 그 또한 왕릉 답사만의 묘미일 것이다.
사적 제205호 파주삼릉은 제8대 예종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 공릉(恭陵)과 제9대 성종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순릉(順陵) 그리고 추존 진종소황제 · 효순소황후 영릉(永陵)을 말한다.
더구나 장순왕후의 공릉과 공혜왕후의 순릉은 세조 대의 지략가 한명회의 두 딸이 잠들어 있다.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모두 한명회의 친딸로서 친가에서는 자매지간이지만, 왕실에서는 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사이였다. 한 집안에서 두 딸을 모두 왕가로 출가시킨 보기 드문 경우였다.
하지만 생전에 권세를 떨치다 죽어서는 부관참시를 당한 한명회의 운명처럼 이 두 딸도 결국 왕비로서의 부귀영화는 커녕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공릉에 잠든 장순왕후는 왕세자빈일 때 원손 인성 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순릉에 잠든 공혜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에 열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명회의 집안으로서는 비극인 셈이다.(http://royaltombs.cha.go.kr/multiBbz/selectMultiBbzView.do?id=35&no=35&bbzId=tombs&mn=RT_01_14_03, 자료제공).
이번 기사는 공릉 순릉 영릉 순으로 나누어 업로딩 할 예정이다. 한개의 기사로 정리하기엔 분량이 많을 뿐 아니라 석물들과 여러 상설에 관한 사진들도 각자 명백히 구분하기 위한 까닭이다.
우선 첫 번째 조선 제8대 예종 임금의 첫 번째 왕비인 장순왕후의 공릉에 대해서 알아보자.
경기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에 위치한 공릉은 단릉의 형식이며 1462년(세조 8)에 조성되고 1470(성종 1년)에 장순왕후라고 추존하고 공릉이라고 명명했다. 왕세자빈의 신분인 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에 알맞은 묘제의 형식을 갖추어 조성하였다.
그렇다면 장순왕후 한씨는 누구인가? 장순왕후 한씨(재세 : 1445년 음력 1월 16일 ~ 1461년 음력 12월 5일)는 본관이 청주인 상당부원군 한명회와 황려부부인 민씨의 셋째 딸로 1445년(세종 27)에 사저에서 태어났다. 1460년(세조 6)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이듬해에 원손 인성 대군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1461년(세조 7)에 사저에서 1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어린 인성 대군마저 3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따라간다. 세조는 세상을 떠난 왕세자빈에게 "온순하고 너그러우며 아름답고 어질고 자혜롭다"는 뜻의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내리며 세자빈 묘로 조성했다가, 성종 즉위 후 1470년(성종 1)에 공릉으로 격상되고 장순왕후로 추존되었다(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64&mn=RT_01_14_01, 참고).
이런 사정들을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통해 살펴보자.
왕세자빈 한씨에게 장순(章順)이란 시호를 내리다:
왕세자빈(王世子嬪)에게 장순(章順)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으니, 온순하고 너그럽고 의용(儀容)이 아름다운 것을 장(章)이라 하고 유순(柔順)하고 어질고 자혜(慈惠)로운 것을 순(順)이라고 한다.
○己巳/賜王世子嬪諡章順, 溫克令儀, ‘章’, (案)〔柔〕 賢慈惠, ‘順’。
세조실록 27권, 세조 8년 2월 4일 기사 1번째기사 1462년(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2004_001, 자료제공).
의논이 올라가니, 전교(傳敎) 하기를,
"장순빈의 시호는 휘인 소덕 장순 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로 하고, 능호는 공릉(恭陵)으로 하고,.......일컬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議上, 傳曰: "章順嬪諡號, 以徽仁昭德章順王后, 陵號恭陵
성종실록 2권, 성종 1년 1월 22일 신축 6번째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ia_10101022_006, 자료제공).
파주 삼릉은 겨울비가 추적내리던 12월에 SBS 방송국의 요청으로 들렀었다. 이번이 두 번째인데 느끼는 것이지만, 이 표지판만 보다가는 그냥 지나치기 쉽다. 이 삼거리에서 곧장 좌회전을 하면 된다.
멋진 입간판 뒤에 서 있는 울타리도 깔끔하게 통일했으면 좋겠다.
공릉 홍살문 바로 옆에 있는 안내 표지판. 적어도 3개국어로 설명된 QR코드가 박혀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 IT 강국 아닌가..^^
공릉 홍살문의 모습
정릉과 같이 직선이 아니라 ㄱ자 형태로 꺾여있다. 애써 곧은 길을 만들지 않고 원래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이런 식의 자연친화적인 모습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에 큰 몫을 했다.
울퉁불퉁한 참도의 모습이 안타깝다. 어차피 원형이 아닌 이상 양주나 강화도에서 당시의 돌들과 유사한 것을 채취해서 조성했으면 좋겠다. 최소한 평탄화 작업 정도는 되었으면 한다. 이날만 해도 일반 관람객들의 발에 채여 박석들이 뒤집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분야만 전문적으로 보수하고 관리하는 장인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문화재청의 주관으로 이런 인력을 전문적으로 양성한 기관이 있어야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로 결론날 것이다. IT강국에 사는 젊은 사람 가운데 문화재를 복원하고 관리하는 일에 평생을 매달릴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임금이 절을 하던 판위에는 검고 부드러운 박석대신에 울퉁불퉁한 돌들이 어지럽게 배열되어 있다. 이곳에서 세조와 성종이 친히 절을 했을 것이다. 물론 이 돌 위에서는 아니겠지만 분명 이 자리에서 했음은 틀림없다. 그런 상상을 하면서 한걸음씩 따라가보는 것 또한 왕릉답사만의 묘미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있는 참도는 직선축이 아닌 절선축으로 조성되었다. 이렇게 기역 자로 꺾인 것은 다른 의도가 아니라 최대한 지형을 훼손하지 않은 채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조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이런 자연친화적인 태도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생긴 모습의 참도는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에서도 보인다. 다음에 정릉을 답사할 때 이곳 공릉의 참도와 비교해 보면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다녀 본 왕릉 가운데 참도의 상태가 너무 울퉁불퉁해서 놀랐다. 또한 판위에 말끔히 있어야 할 검고 표면이 비교적 부드러운 박석들은 온데 간 데 없이 날카로운 돌들이 제멋대로 간신히 모양새만 갖추고 있다. 신도 가운데에 있는 어떤 돌은 관람객들의 발길에 채여 뒤집어진 것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어차피 원형대로 보존된 상태가 아닌 이상, 최대한 유사한 돌을 구해서 재정비되어야겠다.
관계자 분들께 여쭤보니 6.25 사변 이후 주민들이 구들장 용으로 모두 가져갔다고 한다.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겠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은 문화재청이 생기기 전과 생긴 이후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겠다. 그 이전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니 자세한 실정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곳 공릉의 상태만 보더라도 그 이전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말할 것도 없어 보인다.
정자각의 뒤로 능이 보인다. 능상으로 올라가는 곳에 일반인의 접근을 막는 나지막한 울타리가 없다. 그래서인지 이날 초등학생들의 견학이 있었는데 몰래 올라가려는 아이들도 있었다. 낡고 헤어진 울타리보단 없는 편이 보기엔 더 좋다.
비각. 실수로 건너편에 있는 수라간 터를 찍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수라간은 정자각 서남쪽에, 수복방은 정자각 동남측에 위치하고 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정자각을 바라보고 섰을 때, 왼쪽에 수라간이 있고 오른쪽 비각 아래 쪽에 수복방이 있기 마련이다. 이곳에서는 수라간 터만 있고 수복방 터는 보이지 않았다.
정자각. 정작 참도에는 울퉁불퉁한 돌들이 억지로 맞춰진 모양새인데 정자각 앞 마당에는 별다른 이유 없이 넓은 박석들이 쫘악 깔려있다. 어떤 상설도에 따른 것인가. 분명히 원래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계(구름모양의 옆면)와 어계 정자각에서 신들이 능상으로 가기 위해 건너가는 돌다리. 신들만이 다닐 수 있는 신계. 신계의 옆면에 새겨진 구름 모양은 과연 수려하다.
조선국 장순왕후 공릉. 이곳 역시도 중앙 왼편에 총탄의 상흔이 남아있다.
앞과 뒤 비문의 원문과 해석. 지금 이 안내판의 배경색이 조금 어색해 보인다. 홍살문 앞에 있는 공릉 안내판처럼 브라운 철제판에 하얀 글씨로 통일하면 어떨까 싶다. 조심스러운 제안이다. 하지만 이 배경색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공릉의 전경. 망주석과 무석인상이 없어서 허전해 보였다. 대신 봉분이 유난히 크게 느껴져서 처음에는 난간석과 병풍석이 없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조선 전기의 문인상. 이 공릉의 조성 시기상 1기에서 2기로 넘어가는 시점으로 세부적인 부분을 간략화 시킨 대담한 선과 단순화된 옷 주름 표현이 강조된다. 좌우 문인상의 얼굴 모습만은 확실히 달라 보인다.
석양과 석호가 한 쌍씩 배치되어 있다. 세조 때 조성된 석호라 그런지 내가 좋아하는 발톱 모양은 그리 섬세하지 못하다. 귀여운 얼굴 표현도 무딘 편이다.
특히 석양의 다른 아래는 막혀 있는데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한국화는 여백의 미를 강조한다고 했는데 이 시대의 석양 조각가는 아기자기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후기의 석양을 보면 저런 무늬가 없는 걸로 봐서는 어떤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장명등. 8각형에 4각 화창을 가진 1기와 2기 사이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촘촘하고 어지럽게 널부러진 고착지의류는 이곳 장면등 지붕에서 554년간 반복해서 피고 졌을 것이다. 언젠가는 내 손으로 이 고착지의류를 박멸할 방법을 찾고 싶다.
넓은 혼유석과 그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튼튼한 고석들. 혼유석이란 영혼이 놀다가는 곳이다. 저 고석들 아래의 돌은 시신을 매장한 후 최종적으로 마무리 한 덮개에 해당한다.
놀라운 것은 고석에 귀면 조각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세자빈 묘로 조성되었던 터라 생략했던 것일까?
고석에 다만 장식의 의미만 두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조각했어야 했다. 게다가 이 장순왕후의 묘가 조성될 세조 8년에는 상당부원군 한명회가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의 사랑스러운 셋째 딸의 묘를 조성하면서 소홀히 했을 리가 없을 텐데 궁금하다. 이 역시도 산릉도감에 따른 것일까? 석물의 조성에 관한 부분은 따로 정리를 해야한다. 하지만 대부분 정확하게 나뉘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대강의 범주만 있을 뿐이다.
비록 세자빈의 신분에서 요절하였다고는 하더라도 이후 성종에 의해 공릉으로 승격된 마당에 석물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상설을 산릉도감에 따라 추후에 가설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일까? 그 정답은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분명히 나타나 있었다.
의지(懿旨)를 예조(禮曹)에 내리기를,
"공릉(恭陵)과 경릉(敬陵)은 지금 존호(尊號)로 높였으니, 능(陵) 위에는 마땅히 의물(儀物)을 갖추어야 할 것인데, 다만 생각하건대, 신도(神道)는 고요한 것을 숭상한다. 두 능(陵) 은 안치(安置)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동요(動搖) 시킬 수가 없으니, 그 의상(儀象)의 잡물(雜物)은 가설(加設)하지 말아라. 인수 왕비(仁粹王妃)는 지금 위호(位號)를 바로잡았으니 무릇 절일(節日) 의 방물(方物)과 월령(月令) 의 물선(物膳)은 진실로 마땅히 예절과 같이 봉진(封進) 해야 할 것이나, 다만 근래에 국가에서 사고가 많고 민간에서는 일이 번다(煩多) 하여, 예절과 같이 취판(取辦)한다면 백성의 힘을 거듭 피곤하게 할 것이니, 마음속으로 실로 편안하지 못하다. 잠정적으로 수량을 줄여서 봉진하도록 하라."
○下懿旨于禮曹曰: "恭陵、敬陵, 今崇尊號, 陵上宜備儀物, 第念神道尙靜, 兩陵安厝已久, 不可動搖, 其儀象雜物, 勿加設。 仁粹王妃, 今正位號, 凡節日方物, 月令物膳, 固當如禮封進。 但比來國家多故, 民間事煩, 如禮取辦, 重困民力, 心實未安。 姑減數封進。"
성종실록 2권, 성종 1년 1월 25일 갑진 8번째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ia_10101025_008, 자료제공).
성종의 할머니인 자성대비(정희왕후)는 민생안정과 안치된 지 오래된 능이라는 이유로 반대한 것이다. 하지만 장순왕후는 1461년, 성종의 친부인 덕종은 1457년에 각각 승하했다. 자성대비의 이 지엄하면서도 매몰찬 명이 1470년에 내려졌음을 볼 때, 단지 오래되어 백성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는 조금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의 국가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으면 시기를 미뤄서라도 예를 다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나던 조선시대에 엄연히 왕에 의해 왕후로 추숭된 마당에 굳이 민생 운운하며 적극 반대한 자성대비를 한명회는 신하이기 전에 자식을 앞세운 아버지로서 얼마나 섭섭해 했을까? 며느리였던 인수대비와의 신경전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곡장 뒤편에서 본 모습. 병풍석도 난간석도 없지만 봉분만큼은 위엄 있는 크기를 갖추고 있다.
높은 가지에 앉아 햇살 가득 만끽하는 직박구리(상단 오른쪽)와 가냘프고 앙상한 다리로 솜털처럼 날아다니던 곤줄박이(하단 왼쪽) 그리고 먹잇감을 찾아 분주히 돌아다니는 동고비(하단 오른쪽)의 모습.
마냥 귀엽고 이쁘기만 하던 이 참새과의 동고비와 곤줄박이를 보다가, 문득 병약하고 어렸을 장순왕후의 처지가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궁궐에 시집와서 첫아이를 낳고는 산후병으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 장순왕후는 그 이름처럼 "온순하고 너그러우며 아름답고 어질고 자혜로웠을" 것이다.
바닥에서 피어오르던 새파란 이끼들이 봄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왕릉에 가면 언제나 계절을 일러주는 몸짓들이 오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꼬박 1년의 계절을 통해 왕릉을 살펴보았다. 한 번의 답사로는 조선왕릉 관리소 홈페이지에서 알려주는 간략한 지식만 반복해서 확인할 뿐이다. 올해 한국의 담수에 사는 플랑크톤을 관찰하기로 맘 먹었는데, 이왕이면 "왕릉에 서식하는 플랑크톤에 대한 관찰"이라는 부제목을 달아야겠다.
전 세계의 그 어느 공원도 감히 왕릉의 쾌적한 기운과 포근한 경치에 필적할 수 없을 것이다. 아빠와 함께 떠나는 왕릉 답사는 언제나 설렘이 있어서 더욱 좋다.
4월 초 김포 장릉을 마지막으로 서부지구 왕릉 답사는 일단락될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과 청령포를 한번 더 가고 싶다. 그날 저녁 별마루 천문대에서 성운까지 맘껏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윤관우 기자
글쓰기 평가현수랑 기자2016.03.29
읽을 때마다 정말 놀라게 되네요. 정말 어른이 아니라 윤관우 친구가 쓴게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 내용에 수정할 부분은 전혀 없으며 문장 중에
방문과 촬영을 기꺼이 허락해주신 관계자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감사드린다.(어투를 통일하는 것이 좋겠어요.)
이 부분만 수정해서 업로드해요. 앞으로도 멋진 기사 기대할게요~!!!
다음 기사 기대할께요: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