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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나의 조선왕릉 답사기, 제5회 파주 삼릉을 다녀오다 제2편 영릉: 영릉, 세 개의 묘비가 말해주는 추존 진종소황제와 효수소황후의 애달픈 이야기
지난 3월 20일 다녀온 파주삼릉 중 두 번째 영릉의 이야기를 해보자. 추존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의 영릉(永陵)은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번지 파주삼릉 내에 위치해 있다.
영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진종소황제, 오른쪽이 효순소황후의 능이다.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검소하게 조성하였다. 그토록 사랑했던 맏아들의 능이라고 해서 특별히 산릉도감의 형식을 벗어나지 않은 것을 생각해볼 때, 영조는 매우 공평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1728년(영조 4)에 진종이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729년(영조 5)에 파주 순릉 왼쪽 언덕인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751년(영조 27)에 효순소황후가 왕세자빈(현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752년(영조 28)에 효장세자묘 왼쪽에 묘를 조성하였다.
진종의 동생인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이 세자로 등극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하지만 영조 입장에서는 죄 많은 사도세자의 아들에게 무턱대고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묘책이 바로 이미 죽은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시키는 것이었다. 그 후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조의 계승상 아버지가 되는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영릉이라 하였다.
진종소황제(재세 : 1719년 음력 2월 15일 ~ 1728년 음력 11월 16일)는 영조와 정빈 이씨의 아들로 1719년(숙종 45)에 창의궁에서 태어났다. 1724년에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가 이듬해인 1725년(영조 1)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728년(영조 4)에 창경궁 진수당에서 10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영조는 왕세자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1776년(영조 52)에 영조의 명으로 이복동생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양자로 입적이 되자 효장승통세자(孝章承統世子)라 하였고,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그 후 1908년(융희 2)에 진종소황제로 추존되었다.
효순소황후 조씨(재세 : 1715년 음력 12월 14일 ~ 1751년 음력 11월 14일)는 본관이 풍양인 풍릉부원군 조문명과 완흥부부인 이씨의 딸로 1715년(숙종 41)에 숭교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27년(영조 3)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1729년(영조 5)에 진종이 세상을 떠나자 1735년(영조 11)에 현빈(賢嬪)에 봉해졌다. 이후 1751년(영조 27)에 창경궁 건극당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왕세자빈에게 효순(孝純)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세손 정조가 진종의 양자로 입적되자 효순승통세자빈(孝純承統世子嬪)이라 하였다.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효순왕후로 추존되었고, 1908년(융희 2)에 효순소황후로 추존되었다(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66&mn=RT_01_14_01, 자료제공).
영조가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지 불과 4년 만인 1728년 11월 16일 해시(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창경궁 진수당에서 10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영조는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사랑하는 첫 아들 경의군을 황망하게 보낸 뒤 10일 후에 손수 지은 왕세자의 행록을 살펴보자.
임금이 친히 세자의 행록(行錄)을 지어 정원(政院)에 내렸는데, 그 행록에 이르기를,
"세자의 휘(諱)는 행(緈)이고, 자(字)는 성경(聖敬)이다. 기해년 2월 15일 신시(申時)에 순화방(順化坊) 창의궁(彰義宮)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임신하였을 때에 꿈에 서조(瑞鳥)가 당(堂)에 모인 것을 보았고 또 금귀(金龜)를 보았는데, 곧 정빈(靖嬪) 이씨(李氏)가 낳은 바이다. 겨우 두어 살에 성인(成人) 같은 데가 있어서 행동거지가 여느 아이보다 뛰어났다. 신축년 가을에 내가 세제(世弟)가 되어 대궐에 들어올 때에 세자는 나이 겨우 세 살이므로, 어린 나이여서 일찍이 대궐에 같이 들어오지 못하고 잠시 사제에 남겨 두었더니, 노는 중에나 자고 깨는 사이에 자주 아버지를 부르고 혹 계속 부르다가 목이 멘 것은 어버지를 효사(孝思)하는 마음이 천성에 뿌리박혔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대궐에 들어온 뒤로 동조(東朝) 양전(兩殿)을 모실 때에는 무릎꿇고 바로 앉아 응대하는 것이 영향(影響) 같으므로, 삼전(三殿)에서 특별히 사랑하였다. 갑진년 겨울에 비로소 경의군(敬義君)에 봉하였고, 을사년 봄에 세자로 진봉(進封)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으나 대정(大庭)에서 행례(行禮)하고 정당(正堂)에서 하례(賀禮)받을 때에 거동하고 주선하는 것이 예절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본성이 그런 것이다. 어찌 보통 가르침이 미칠 바이겠는가?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세자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궁료(宮僚)를 접대할 때뿐만 아니라 한가한 가운데 중관(中官)과 있을 때에도 엄연하기가 어른 같아서 장난하는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작은 내관(內官) 두 사람이 서로 말다툼하여 행동을 삼가지 않으므로 세자가 한참 잠자코 보다가 다른 중관을 불러 말하기를, ‘이 내관은 다시 시종하지 말게 하라.’ 하였는데, 중관이 그 까닭을 몰라서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조금 전에 내 앞에서 서로 다투어 공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중관이 이 일을 대조(大朝)께 여쭈어 경계하겠다고 청하자, 비로소 허락하였으니, 잠시 사이에도 조용하고 엄숙한 것이 이러하였다. 또 평소에 중관과 학문을 강구하며 글자를 썼으며, 젊은 내관과 놀지 않고 늘 노성(老城)한 중관과 있었으니, 그 상정(常情)보다 뛰어난 것이 한결같았다. 모든 완호(玩好)에 조금도 마음두지 않고 늘 말하기를, ‘볼 만하기는 하나 한 번 보면 족하다. 어찌하여 반드시 마음두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운관(雲觀) 에서 문신종(問辰鍾)을 바쳤으나, 이것도 한 번 보고는 서당(書堂)에 두었는데, 젊은 내관이 보다가 우연히 손상하였다. 이 일을 나에게 고하므로, 다른 뜻이 없이 일어난 일이라 하여 문책하지 말게 하였더니, 세자가 옆에서 웃었다. 내가 돌아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이것은 하치않은 물건인데, 하찮은 물건 때문에 웃었습니다.’ 하므로, 내가 절로 마음이 감탄되어 스스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세자의 도량이 너그러워 이와 같이 용납하니, 이것은 우리 동방의 복이다.’ 하였다. 《효경(孝經)》을 다 강독(講讀)하고 내 앞에서 전강(殿講)할 때에 내가 효란 어떤 것이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어버이를 섬기되 도리를 다하는 것이 효입니다.’ 하였으니, 그 요지(要旨)를 아는 것이 이러하였다. 주연(胄筵) 에서 소대(召對)할 때에 궁관(宮官)이 아뢴 것이 혹 틀리거나 아뢴 것이 전에 강독한 것이면, 그 주연을 마치고서 좌우에게 묻기를, ‘전후의 궁관이 말이 어찌하여 서로 다른가? 또 아뢴 것은 《효경》 어느 장(章)과 《소학(小學)》 어느 편(篇)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였으니, 그 마음을 쏟아 듣고 늘 유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미년 봄에 선성(先聖)을 전알(展謁)하고 입학하였고, 그해 가을 9월에 관례(冠禮)를 행하였으며, 또 그 달에 초례(醮禮)를 행하였다. 그때 아홉 살이었는데, 강독하는 소리가 청랑(淸朗)하고 거동하는 예절이 성인(成人)처럼 엄연하였다. 육례(六禮)를 행한 날은 날씨가 모두 청명하였다. 마음이 절로 기뻐서 ‘그 형상을 보지 못하나 그 그림자를 살피고 싶다.’ 하였으나, 모든 일에 하루도 한가한 틈이 없었다. 책봉(冊封)하고부터 무릇 입학·관례·가례(嘉禮)하던 날에 일기가 모두 청랑하여 밤이나 아침이나 흐리지 않았고 그 행사가 번번이 이러하였으니, 하늘이 종사(宗社)를 돕는 것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었다. 나는 덕이 없을망정 세자는 동국(東國)의 희망이었는데, 어찌 오늘날 갑자기 서거할 줄 알았겠는가? 말이 여기에 미치면 절로 길게 탄식하게 된다. 새것을 맛볼 때마다 차마 먼저 맛보지 못하고 반드시 다 바쳤고, 병이 있더라도 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세수하고 의대(衣帶)를 갖추고 나를 찾았다. 동기를 우애(友愛)하는 것도 본연(本然)에서 말미암았는데, 대궐 안의 사례(事例)는 거처하는 곳이 다르므로 자주 가서 보았고, 좌우의 궁인(宮人)이 불화한 말을 하면 세자가 혹 틈이 벌어질 것을 마음 아파하여 눈물을 머금고 나에게 고하였으니, 그 효우(孝友)하는 성품이 모두 이러하였다. 또 모든 일에 미안한 일이 있으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중관(中官)을 시켜 엄정하게 타이르니, 궁인이 모두 두려워하고 탄복하였다.
아! 병이 위독하여졌을 때에도 그 스승이 들어온다는 말을 들으면 벌떡 일어나 앉아 다시 용모를 단정히 가다듬고 또 말하기를, ‘빈객(賓客)이 들어오므로 일어나고자 하나 힘이 미치지 못한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평소의 성품을 알 수 있다. 한 번 병들어 낫지 않은 채 오래 끌게 된 뒤로 설사를 막고 어지러움을 돕는 데에 의약(醫藥)이 효험이 없으니, 탄식하며 나에게 고하기를, ‘세상에 명의(名醫)가 없는데 잡되게 여러 약을 써보면 괴로움만 가져올 뿐이니, 다시 약을 쓰지 말고 조용히 스스로 안정하고 싶습니다.’ 하였다. 그 약을 물리치고 천명에 맡기는 것은 노사(老師)·숙유(宿儒)가 사리에 통달하여도 미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임종 때에 내가 얼굴을 얼굴에 대고 나를 알겠느냐고 부르자 희미하게 응답하는 소리를 내며 눈물이 뺨을 적셨으니, 간절한 효심(孝心)이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마음 아프다. 무신년 11월 16일 해시(亥時)에 창경궁(昌慶宮)의 진수당(進修堂)에서 훙서(薨逝)하니, 수(壽)는 겨우 10세이고, 세자 자리에 있었던 것이 겨우 2년이다. 아! 내가 덕이 없어서 믿는 것이 오직 원량(元良)이었고, 성품도 이러하므로 동방의 만년의 복이기를 바랐는데, 어찌 나이 겨우 열 살에 이 지경이 될 줄 알았겠는가? 종사를 생각하면 아픔 또한 누르기 어렵다. 이제 행록에는 평소에 뛰어난 것만을 기술하였으니, 어찌 한 자 한 구라도 그 일보다 불렸겠는가? 내가 배우지 못하였더라도 그런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니, 모두 중관이 함께 듣고 조신(朝臣)이 함께 본 것이었다. 꿈이 상서로워 상서로운 조짐에 가까웠던 것으로 말하면 전후의 시장(諡狀)에 이미 이러한 말이 있으나, 모두 내가 꿈꾼 것이므로 처음에 대략 적었다. 아! 애통한 가운데 차마 상세히 쓰지 못하고 간략하게 지었다. 시장을 제술(製述)하는 관원은 내가 다하지 못한 곳을 상세히 해야 하나, 과대하지 않아야 한다. 국기(國忌)를 당할 때마다 어린 나이라 하여 소선(素膳)을 장만하지 않으면 중관을 시켜 장선 궁인(掌膳宮人)을 불러 엄한 말로 타일렀으므로, 안팎 사람들이 모두 동색(動色)하였다."
하였다.
○上親製世子行錄, 下于政院, 其行錄曰:
世子諱緈, 字聖敬。 己亥二月十五日申時, 生于順化坊 彰義宮私第。 及其妊娠, 夢見瑞鳥, 集于室, 復見金龜焉, 卽靖嬪 李氏所誕也。 甫數歲, 有若成人, 行動擧止, 超乎凡兒。 辛丑秋承儲入闕也, 世子年纔三歲, 故幼沖之年, 趁未能同詣闕中, 姑留私第矣, 遊戲之中, 夢醒之間, 頻呼爺, 或仍呼嗚咽者, 孝親之心, 根於天性故也。 其冬入闕之後, 侍於東朝兩殿也, 跪膝正坐, 應對如響, 三殿奇愛之。 甲辰冬, 始封敬義君, 乙巳春, 進冊儲副, 年甫七歲, 而及夫大庭行禮, 正堂受賀, 動容周旋, 無不中禮, 是本性之然也。 豈常敎所及哉? 方在沖年, 承此貳極, 而非特接對宮僚,燕居之中, 與中官處, 儼若大人, 未嘗遊戲焉。 一日, 小內官兩人, 相與言詰, 擧措不謹, 故世子默視良久, 招他中官而言曰: "此內官須更勿侍。" 中官莫知其故, 請問其故, 乃曰: "俄於余前相詰, 不恭故也。" 中官請以此稟于大朝, 警飭焉, 始許, 其造次之間, 從容嚴肅, 若此也。 且於平時, 與中官講學書字也, 不與年少內官遊, 而每與老成中官處焉, 其超乎常情, 一如也。 凡諸玩好, 無一潛心, 而常曰: "雖可觀, 一見足也。 何必心着?" 自雲觀進問辰鍾, 此亦一覽而已, 置諸書堂矣。 年少一內官, 見而偶傷, 以此告于予, 以事出無情, 勿問矣, 世子從傍而笑焉。 予顧問其由, 對曰: "此微物也, 因微物而請罰人, 是以笑。" 云, 故予不覺心嘆而自喜曰: "世子器度寬容若此, 此吾東之福矣。" 畢講《孝經》, 殿講于予, 予問孝者何事? 對曰: "事親盡道者, 孝矣。" 其得要旨若此也。 於冑筵, 召對宮官, 所達者其或差焉, 或所陳者, 前所講者, 則及夫筵畢, 問于左右曰: "前後宮官之言, 其何相違? 且所陳非《孝經》某章、《小學》某篇所載者耶?" 其潛心聽焉, 常時留意, 可知也。 丁未春, 謁先聖, 齒于學, 同年秋九月, 行冠禮, 又同月, 行醮禮。 時九歲, 而講聲淸朗, 動容禮節, 儼若成人。 六禮之日, 日氣俱淸。 明心自喜曰: "不見其形, 願察其影。" 凡事難乎一日之暇。 而自冊封與夫入學、冠禮、嘉禮之日, 日皆淸朗, 夜朝無陰, 及夫行事, 每也如此, 天佑宗祊, 可以仰料。 予雖涼德, 東國其庶幾, 豈意今日, 遽以逝焉? 興言及此, 不覺長吁。 每嘗新物, 不忍先嘗, 必皆獻之, 雖有疾恙, 不至重焉, 則必盥洗衣帶而見予焉。 友愛同氣, 亦由本然, 闕中事例, 所處異焉, 頻頻往視, 而左右宮人, 若有不協之言, 世子痛其或流間焉, 飮泣告予, 其孝友之性, 一若此也。 且凡事有未安之事, 則不以遽色, 使中官, 嚴正曉諭, 宮人莫不畏而嘆服。 嗚呼! 疾篤也, 聞其師之入來, 幡然起坐, 更以斂容, 又曰: "賓客之入, 欲起而力未能焉。" 此可見平日性稟也。 一疾沈綿之後, 補瀉相眩, 醫藥罔效, 嘆聲告予曰: "世無名醫, 雜試諸藥, 徒致煩苦, 願勿更藥, 從容自靜焉。" 其却乎陳根, 付之天命, 非老師、宿儒達理所可及也。 及夫臨革, 予以顔接顔, 呼以知予乎云, 則微微應聲, 眼淚沾腮, 洞洞孝心, 不泯乎耿耿之中故也。 嗚呼! 痛矣。 戊申十一月十六日亥時, 夢逝于昌慶宮之進修堂, 壽甫十歲, 居貳極者, 纔二年矣。 嗚呼! 予以匪德, 所恃者惟元良, 而性又若此, 冀東方萬年之福矣, 何意年纔一旬, 至乎此境? 言念宗社, 痛又難抑。 今玆行錄, 只述平日表表者, 豈一字一句, 溢乎本事? 予雖不學, 不爲此也, 皆中官之所共聞, 朝臣之所共覩者也。 至於夢瑞, 近乎符瑞, 前後諡狀, 已有此等語, 俱予所夢, 略記于初焉。 嗚呼! 哀痛之中, 忍寫若割, 略略撰焉。 諡狀製述之官, 予未盡處, 其須詳焉, 不當夸大焉。 每當國忌, 以其沖年, 若不爲備素膳, 則以中官, 召掌膳宮人, 嚴辭諭焉, 內外之人, 莫不動色矣。
영조실록 20권, 영조 4년 11월 26일 임신 2번째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ua_10411026_002, 자료제공).
인용한 행록 가운데 영조가 아들 경의군의 사람됨을 서술한 부분은 붉게 강조해 두었다. 한 나라의 군주이기 전에 아버지였던 영조. 왕세제로 있을 당시 사저에서 태어나 경종의 죽음 이후 왕으로 등극하기 전까지 서로 오매불망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
그런 금쪽 같은 아들인데다 그 사람됨은 물론이고 "거동하는 예절이 성인(成人)처럼 엄연"하였으니 얼마나 뿌듯하고 소중한 존재였을까? 또한 병이 심해졌을 때 단호하게 약을 물리치고 천명에 맡기는 태도나 죽음에 이르러서도 아버지에 대한 한줄기 효심을 발휘했던 장한 아들이었다. 특히 "그 임종 때에 내가 얼굴을 얼굴에 대고 나를 알겠느냐고 부르자 희미하게 응답하는 소리를 내며 눈물이 뺨을 적셨으니, 간절한 효심(孝心)이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及夫臨革, 予以顔接顔, 呼以知予乎云, 則微微應聲, 眼淚沾腮, 洞洞孝心, 不泯乎耿耿之中故也。)"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빠에게서 이처럼 애닮은 사연을 듣고 나서 능침을 내려오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경의군이 그대로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면, 그래서 사도세자와 뒤주의 비극이라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시나리오가 없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어쩌면 오해일지도 모르는 경종 독살설의 주범이라는 미스터리와 혹은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 그리고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하고 냉혹한 아버지이자 군주라는 오명을 남긴 영조.
그 인격적 콤플렉스는 어쩌면 너무나 사랑했던 경의군을 앞세우고 얻은 병이 아닐까? 유난히도 눈물이 많았던 "아버지 영조"는 이때부터 울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눈물을 뒤로 하고 영릉을 살펴보기로 하자.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1쌍씩 배치하였다. 하지만 추존왕의 능이라 그런지 난간석과 무인석은 보이지 않는다.
영릉의 안내판.
금천교와 홍살문 그리고 참도에서 정자각까지 거의 일자로 이어져 있다. 하지만 홍살문을 지나보면 어색하도록 좁은 참도가 보인다. 어찌 된 일인가?
참도 가운데 신도만 있고 어도가 사라지고 없다. 당시 보수를 하시던 소장님께 물어봤는데, 이곳에 알맞은 돌을 아직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왕릉에 사용된 돌들은 강화도나 양주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아마 문화재청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노력을 하시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내년쯤에는 제대로 된 참도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공릉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참도가 끝나는 곳과 정자각 사이에 드넓은 판석 뜰이 존재한다. 이 또한 상설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보수공사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궁금하다.
구들장 용으로 주민들이 다 가져간 탓에 다른 박석으로 대체했을 것이다. 이 파주삼릉 가운데 순릉만이 그나마 제대로 된 판위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신계(상)와 어계(하).
정자각이 낮아서인지 어계가 두 개뿐이다.
영릉의 비각은 총 2개로 비각 안에는 세 기의 능표석이 있다. 1비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비, 2비는 진종대왕(眞宗大王)의 비, 3비는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의 비로 진종이 추존될 때마다 능표석을 새로 세웠다.
조선국 효장세자묘, 효순현빈부좌. 제일 위쪽의 비각에 있는 묘비로 영조 때 최초로 세워진 것이다. 이때는 왕세자의 신분으로 돌아가셨으므로 효장세자의 묘라고 칭했다.
조선국 진종대왕영릉, 효순왕후부좌. 이것은 정조가 등극하고 나서 양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나서 세운 묘비이다.
대한 진종소황제영릉, 효순왕후부좌. 마지막 이 묘비는 고종 때인 대한 제국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영조와 정조 그리고 고종의 대한 제국에 이르기까지 무려 두 번이나 추존되었다. 그리하여 다른 왕릉과는 달리 비각이 두 개나 된다. 맨 위쪽은 영조 때의 비문이 단독으로 세워져 있고, 아래쪽 넓은 비각에는 정조와 고종 대에 세운 비문이 각각 놓여 있다.
이곳 파주 삼릉에서 가장 화려한 어처구니가 설치되어 있다. 앞에서부터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의 모습이 보인다. 사오정까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정자각에서 능침으로 올라가는 신교. 왕릉의 신교치고는 조금 어색하다. 정자각과 능침을 이어주는 부분이 서로 높낮이가 맞지 않는다. 원래부터 이랬을 리는 없을 텐데 궁금하다. 마침 보수하던 공사책임자가 있었지만 물어보지 못 했다.
산신석. 우측 하단에 난 구멍은 무슨 용도일까?
축문을 태우던 예감
이곳 영릉이 특이한 점을 들자면 단연 두 개의 비각에 얽힌 역사적 사연이겠지만, 나는 이 능침으로 올라가는 곳에 돌연 솟아난 이 돌을 주저없이 들겠다.
1729년(영조 5)에 파주 순릉 왼쪽 언덕인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할 때부터 이 돌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추측해보면, 명당을 골라 순릉 왼쪽 언덕 명당에 자리를 정하였으나 능상을 조성할 때 삐쭉 솟아난 이 돌을 발견하고는 담당 감독관은 단순한 돌이라고 생각하여 파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뿌리가 너무 깊어 파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왕릉 조성이라는 지엄한 상황이라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파내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이 여러 가지 이유에서 명당이라면 이 돌 또한 자연물로 인정하고 그대로 둔 채로 조성했던 것이다.
우리 조선왕릉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세 가지 기준에 대해서 알아보자.
Criterion (iii): Within the context of Confucian cultures, the integrated approach of the Royal Tombs of Joseon to nature and the universe has resulted in a distinctive and significant funeral tradition. Through the application of pungsu principles and the retention of the natural landscape, a memorable type of sacred place has been created for the practice of ancestral rituals.
Criterion (iv): The Royal Tombs of Joseon are an outstanding example of a type of architectural ensemble and landscape that illustrates a significant stage in the development of burial mounds within the context of Korean and East Asian tombs. The royal tombs, in their response to settings and in their unique (and regularized) configuration of buildings, structures and related elements, manifest and reinforce the centuries old tradition and living practice of ancestral worship through a prescribed series of rituals.
Criterion (vi): The Royal Tombs of Joseon are directly associated with a living tradition of ancestral worship through the performance of prescribed rites. During the Joseon period, state ancestral rites were held regularly, and except for periods of political turmoil in the last century, they have been conducted on an annual basis by the Royal Family Organization and the worshipping society for each royal tomb(http://whc.unesco.org/en/decisions/1957, http://whc.unesco.org/archive/2009/whc09-33com-8Be.pdf).
기준 (ⅲ) : 유교 문화의 맥락에서, 조선왕릉은 자연 및 우주와의 통일이라는 독특하고 의미 있는 장례 전통에 입각해 있다. 풍수지리의 원리를 적용하고 자연경관을 유지함으로써 제례를 위한 기억에 남을 만한 경건한 장소가 창조되었다.
기준 (ⅳ) : 조선왕릉은 건축의 조화로운 총체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로, 한국과 동아시아 무덤 발전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 준다. 왕릉은 특별한 (또한 규범화된) 건축물, 구조물 요소들의 배치를 보여 준다. 그리고 몇 세기에 걸친 전통을 표현하는 동시에 보강한다. 또한 미리 정해진 일련의 예식을 통한 제례의 생생한 실천을 보여 준다.
기준 (ⅵ) : 조선왕릉은 규범화된 의식을 통한 제례의 살아 있는 전통과 직접 관련된다. 조선 시대에 국가의 제사는 정기적으로 행해졌으며, 지난 세기의 정치적 혼란기를 제외하고 오늘날까지 왕실 및 제례 단체에 의해 매년 행해져 왔다.
이 가운데에서도 기준 (ⅲ)에서 말하는, 풍수지리의 원리를 적용하고 자연경관을 유지함으로써(Through the application of pungsu principles and the retention of the natural landscape) 제례를 위한 기억에 남을 만한 경건한 장소가 창조되었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말 그대로 왕릉을 조성할 때 아름다움이나 존엄이라는 기준을 들어 주위의 자연경관을 헤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곳 영릉에 있는 난데없이 불쑥 도드라진 바위야말로 조선왕릉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빗물에 자연스럽게 드러난 소나무의 뿌리를 계단 삼아 능침으로 올라갔다.
4각형과 원형 화창. 보통 제4기에도 8각형의 장명등이 등장하기도 한다.
문석인은 관모를 쓰고 양손으로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한 편이다. 관복의 소매는 길게 늘어져 있고, 팔꿈치 부근에는 세 줄의 주름이 새겨져 있다.
제4기에 해당하는 왕릉의 석물답게 사실에 가까운 복식과 인체를 표현한 문인석과 석마의 모습. 유난히 키가 작은 두 석물이 인상적이었다.
위가 진종의 능, 아래가 효순왕후의 능이다. 아무래도 23년이 지난 후에 조성된 묘라 그런지 혼유석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다. 평소 검소한 생활도 유명했던 영조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아무리 맏아들의 능일지언정 세자의 신분으로 승하하였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상설을 하였다.
혼유석 아래의 석판들이 앞뒤로 어긋나 있다. 그래도 진종의 묘는 괜찮은 편인데 효순왕후의 석판은 수평이 맞지 않다.
고석의 귀면 조각. 언젠가 능침에 앉아 직접 그려보고 싶다. 지금까지 살펴 본 귀면들은 한결같이 비슷해 보이면서도 조금씩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이곳 영릉의 귀면만 해도 모두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언뜻 보면 다 비슷해보이지만, 입모양을 유심히 살펴보면 훨씬 흥미롭다.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입 모양 위주로 살펴보자.
1번은 뭔가를 강력한 인상을 보여주기 위해 비교적 작은 눈을 부라리고 있으며 뭔가 단호한 말로 겁을 주려고 한다.
2번의 귀면은 조명 탓인지 두상이 좀 작고 맘씨 좋은 동네 아저씨처럼 실없이 웃고 있다. 미간 사이의 깊은 두개의 주름 마저도 정겹다.
3번은 2번 귀면보다는 좀 더 젊어보이며 아랫니가 몇개 빠져있는 모습이 오히려 착하고 순해보인다.
마지막으로 4번은 제일 사나워보이는 편인데, 특히 송곳니도 불규칙하고 상하 치아 모두가 작고 단단해 보이며 두툼하며 넓은 콧구멍, 왠지 애꾸눈에 혀를 낼름거리는 듯한 표현이 인상적이다.
문득 든 생각인데, 이런 귀면을 조각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 혹은 동료들의 표정들을 읽어내고 은연 중에 반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름은 귀면이지만 사실 다 사람들의 표정을 닮았다. 이 또한 왕릉 답사의 작은 기쁨이다.
석양의 조각이 무척 사실적이고 섬세한 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석호의 모습. 유난히 송곳니가 길게 나와있고, 꼬리는 어색할 정도로 곧게 옆구리 쪽에 딱 달라붙어 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긴 송곳니를 드러내더라도 크고 동그란 눈을 보면 장난기 어린 모습처럼 보인다. 경의군이 겨우 10세 때 승하하신 탓에 더욱 귀엽게 조각해 낸 것은 아닐까? 동글동글한 발은 귀엽고 갸날픈 발은 그대로 앙증맞다.
얼굴 표정뿐 아니라 발톱만 보더라도 무척 어린 석호임에 틀림없다. 당시의 석공들은 이런 사정을 알고 배려한 것일까? 어린 경의군의 훌륭한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망주석. 세호도 꽤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치 세수를 한 듯 깨끗한 석마의 얼굴과 연꽃으로 보이는 조각이 멋있다. 석마의 얼굴 표정과 덩치로 볼 때, 기존의 석마들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이 또한 진종의 어린 나이 탓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직박구리 한 마리가 답사 내내 따라다녔다. 30배율의 카메라를 사고 나서 새를 관찰하는 게 무척 재밌는 일상이 되고 있다.
묘 뒤편에서 바라본 장명등의 모습. 거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23년의 세월을 후손 없이 외롭게 살다가 창경궁 건극당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난 효순왕후. 죽어서는 진종의 묘 옆에서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병명도 몰랐으니 제대로 된 약을 썼을리도 없었던 조선시대. 너무나 안타까운 경의군을 죽음과 또한 거대한 상실감으로 하늘만 쳐다봤을 영조. 그 애틋함을 영릉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부모 잃은 자식은 3년 상을 지내며 맘껏 슬퍼했겠지만, 조선시대의 군주이자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도 못할 정도다. 그 슬픔을 사도세자의 탄생으로 겨우 달랬을 영조. 하지만 경의군과는 다르게 변모하는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실망은 결국 분노로 이어졌을 것이다.
또한 경의군의 상실에 대한 반동적 보상으로써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감 역시 과도했을 것이다. 경의군에 대한 기록은 영조가 어필로 작성한 행록이 전부이지만, 이 사건이 이후 영조의 인격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를 심리학적 혹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다룰 수 있다면 큰 성과가 될 것이다.
역사는 단순한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그 묘미가 있다.
윤관우 기자
글쓰기 평가현수랑 기자2016.04.27
능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능에 얽힌 이야기까지 재미있는 소설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마무리도 무척 흥미로웠고요. 정말 잘 쓴 기사예요!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