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과학동아&수학동아 기사
[연속기획] 나의 조선왕릉 답사기, 제7회 김포장릉을 다녀오다 추존원종과 인헌왕후 이야기: 선조의 삐뚤어진 자식사랑
지난 4월 3일 호지프활동(http://williology.blog.me/220673882394)을 겸해서 김포장릉을 방문했다. 이곳 김포장릉은 추존 원종 · 인헌왕후 장릉(章陵)으로서 경기도 김포시 장릉로 79번지에 위치한 쌍릉이다.
1619년(광해군 11)에 선조의 왕자 정원군(원종, 1580~1619)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에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1623년에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원대원군으로 추봉되고, 1626년(인조 4)에 계운궁 연주부부인(인헌왕후)이 세상을 떠나자 김포 성산에 육경원을 조성하였다. 이때 정원대원군의 원의 이름을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다. 이듬해인 1627년에 흥경원을 육경원으로 천장하면서 원의 이름을 흥경원이라 하였다가, 1632년(인조 10)에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이때 능을 왕릉제도에 맞게 새로 조성하였다. 이렇게 1626년(인조 4), 1627년(인조 5), 1632년(인조 10) 총 세번에 걸쳐서 장릉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원종대왕의 졸기를 살펴보자.
【원종 대왕(元宗大王)이 【정원군(定遠君)을 추존한 칭호이다. 】 훙(薨)하였다. 대왕은 어려서부터 기표(奇表)가 있었고 천성이 우애가 있어 특별히 선조(宣祖)의 사랑을 받아 전후로 선물을 내려준 것이 왕자에 비할 수 없이 많았다. 왕이 왕위에 올라 골육을 해치고는 더욱 대왕을 꺼렸다. 능창 대군(綾昌大君)을 죽이고는 그 집을 빼앗아 궁으로 만들고, 인빈(仁嬪)의 장지(葬地)가 매우 길하다는 말을 듣고는 늘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해서 죄에 얽어 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왕은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하였는데, 훙할 때의 나이가 40세였다. 상이 그 장기(葬期)를 재촉하고 사람을 시켜 조객을 기찰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양주(楊州) 곡촌리(谷村里)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금상(今上)037) 이 왕통(王統)을 계승하자 대원군(大院君)으로 진호(進號)하였다. 정묘년에 김포(金浦)에 개장(改葬)한 뒤 묘호(墓號)를 흥경원(興慶園)이라 하고, 임신년에 존호(尊號)를 ‘원종 경덕인헌 정목장효 대왕(元宗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이라 올리고, 비(妃)는 ‘경의정정 인헌 왕후(敬毅貞靖仁獻王后)’라 올리고, 묘호를 ‘장릉(章陵)’이라 하였다. 그리고 주청사 홍보(洪靌) 등을 보내어 책명(冊命)을 추청(追請)하니, 중국에서 ‘공량(恭良)’이란 시호를 내렸다.】
○元宗大王【定遠君追稱。】 薨。 大王幼有奇表, 天性友愛, 特爲宣祖所鍾愛, 前後錫賚, 他王子莫望焉。 及王在位, 戕害骨肉, 尤忌大王。 旣殺綾昌, 奪其第爲宮。 又聞仁嬪葬地大吉, 常使人窺覘, 欲構害之。 大王悲憂鬱鬱, 飮醇酎成疾。 常曰: "吾日出知去夜之無事, 日沒知今日之幸過。 惟願早終牖下, 從先王於地下耳。" 薨時年四十矣。 王促其葬期, 使人譏察弔客。 由是寓葬楊州 谷村里。 及今上承統, 進號大院君。 丁卯改葬金浦, 墓號興慶園, 壬申追上尊號曰: ‘元宗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妃曰: ‘敬毅貞靖仁獻王后。’ 墓號章陵。 遣奏請使洪霽等, 追請冊命, 中朝賜諡恭良。
(광해군일기[중초본] 147권, 광해 11년 12월 29일 무인 6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oa_11112029_006, 자료제공).
기존의 실록기록과는 상당히 달라보인다. 아직 디지털화가 안되었을리는 없는데 무슨 이유로 필사본을 그대로 스캐닝했던걸까? 그래서 중초본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떤 글자는 붓으로 꾸욱 눌러지우기도 하고 아무렇게 덧대거나 고쳐쓰기도 한 흔적이 인상적이다. 원래의 실록이란 이런 모습이었을까? 내 눈에도 읽히는 글자가 있으니 초서일리는 없고 조금 빨리 쓴 해서처럼 보이기도 하다. 여하튼 처음 보는 실록의 모습이라 그런지 새롭다.
졸기에도 나와 있듯이,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왕으로 등극한 뒤 광해군을 해하고 왕이 되려고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교동에 위리안치 되었으나 자결하였다. 아버지로서 임금에 대한 원망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종종반정과 달리 스스로 왕이 된 인조반정의 주인공이자 정원군의 아들인 인조는 그래서 더더욱 왕이 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장릉의 묘비에는 "어릴 때부터 겸손하고 효도와 우애가 천성에서 우러나와 자손들에게 백성이 가진 재산을 사랑하고 아랫사람을 불쌍히 여기라"라고 일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록은 전혀 다른 말들을 하고 있다.
선조는 나중에 얻은 계비 인목대비에게서 얻은 영창대군을 제외하고, 6명의 후궁에게서 13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정원군(定遠君)은 악명 높은 세 왕자였다.
이 가운데 가장 포악한 자는 순화군이었는데 실록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망기로 전교하였다.
"순화군(順和君)이 있는 곳에 때로 내관(內官)을 보내 물품을 하사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바깥 담장을 부수어 철거했다고 했지만 나는 듣고도 못들은 것처럼 하였었다. 그런데 이제 듣건대, 사람을 잡아다가 매를 심하게 때려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하니, 지극히 해괴하다. 이는 금부(禁府)가 항상 검속(檢束)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니 색낭청을 파직하라. 얼핏 들으니, 모전(毛前) 근처의 사람이 구타당했다고 하는데 속히 해당 관아로 하여금 조사해서 다친 정도를 추문(推問)하여, 어떤 사람이 무슨 일로 인하여 매를 얼마나 맞았으며, 어떤 사람이 잡아다 주고 어떤 사람이 매를 때렸는지를 아울러 상세히 핵계(覈啓)하도록 하라."
사신은 논한다. 순화군은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궁인(宮人)을 겁탈하였으니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다. 대간(臺諫)이 율(律)에 따라 죄를 정할 것을 아뢰었으나 상이 사죄(死罪)를 감하여 수원(水原)에 안치했고, 얼마 후 서울 가까이로 이배(移配)하였으니, 이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이다. 이때에 와서 또 사람을 잡아다 곤장을 쳤는데, 이는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핵계하라는 전교를 내렸으니,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것이었다. 상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하니, 위대하도다. 왕의 마음가짐이여, 예로부터 훌륭한 임금으로 전해오는 삼황 오제의 반열에 끼일 만하다 하겠다. 다만 여러 왕자들 중 임해군(臨海君)과 정원군(定遠君)이 일으키는 폐단도 한이 없어 남의 농토를 빼앗고 남의 노비를 빼앗았다. 이에 가난한 사족(士族)과 궁한 백성들이 모두 자기의 토지를 잃었으되 감히 항의 한번 못하여 중외가 시끄러웠으니, 인심의 원망하고 이반됨이 어떠하겠으며, 나라의 명맥이 손상됨이 어떠하겠는가. 상이 순화군을 책하는 마음을 임해군과 정원군에게 옮기지 않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辛丑/以備忘記傳曰: "順和所在處, 時或遣內官賜物, 來言外墻撤破, 予聽若不聞矣。 今聞捉致人物, 重杖將死云。 極爲駭愕。 禁府常時不爲撿察, 色郞廳罷職。 似聞毛前近處人, 被打云。 速令該司, 審驗所傷輕重, 推問某人因某事, 被打幾何, 某人捉給, 某人下杖, 幷詳細覆啓。"
【史臣曰: "順和君, 居倚廬, 㤼干宮人, 是難赦之罪。 臺官以依律定罪啓之, 上, 減死安置于水原, 中移於近京之地, 愛子之心也。 至是拿杖人物, 是非大段事, 而有此覈啓之敎, 愛民之心也。 上之愛民之心, 勝於愛子之心, 大哉王心! 可以四三王, 而六五帝也。 第惟諸王子臨海君、定遠君之作弊, 罔有紀極, 奪人之田、奪人之奴, 寒士窮民, 皆失其田民, 莫敢誰何, 中外騷然。 人心之怨畔如何, 國脈之斲喪如何? 上, 不以責順和之心, 移於臨海、定遠, 可勝恨哉?"】
(선조실록 151권, 선조 35년 6월 11일 신축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06011_001, 자료제공).
상중인데도 궁인을 겁탈하는 패륜을 서슴지 않았던 순화군을 보다 못한 선조는 죽을 죄임에도 선처를 베풀어 주면서 선조도 조금 난처했는지 그 죄상를 상세히 보고하고 피해입은 백성을 살피라는 전교를 내렸다.
하지만 사관은 순화군만 벌 줄 것이 아니라 천하의 둘도 없는 패륜아 형제인 임해군과 정원군에게도 그 죄를 묻지 않음을 한탄해 하고 있다
이후 기록을 보면 이 살인사건으로 인해서 순화군은 모든 군 보직에서 해임되고 수원으로 유배를 떠나지만 그곳 유배지에서도 맘에 들지 않으면 누군든 구타하며 물의를 일으켰다고 한다.
백성을 가장 어여삐 여기고 비록 자식이라고는 하지만 그 죄를 물음에 있어 공평무사해야 할 선조임금의 처세는 매우 부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순화군의 인간됨을 잘 보여주는 졸기를 보면 오히려 인간적인 동정이 갈 정도이다.
이보(李)가 졸하였다. 【보는 왕자다. 성질이 패망(悖妄)하여 술만 마시면서 행패를 무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비록 임해군(臨海君)이나 정원군(定遠君)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 호환(虎患)을 피하듯이 하였다. 이에 양사(兩司)가 논계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안치시켰는데, 이 때에 이르러 죽었다. 상이 특별히 명하여 그의 직을 회복시켜 순화군(順和君)이라 하고, 익성군(益城君) 이향령(李享齡)의 아들 이봉경(李奉慶)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
○卒。 【, 王子也。 性度悖妄, 飮輒使酒, 奪人財産。 雖不及臨、定兩宮, 而殺害無辜, 歲至十數, 都民大懼, 如避虎禍。 兩司論啓, 削奪安置, 至是卒。 上特命復其職, 爲順和君, 以益城君 享齡子奉慶爲後。】
(선조실록 209권, 선조 40년 3월 18일 신사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4003018_003, 자료제공).
사람이 죽은 다음 그 사람의 됨됨이를 기록한 것이 졸기이다. 패륜아 정원군조차도 졸기만큼은 깨끗한 편이었다. 하지만 순화군의 졸기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성질이 패망하여 늘행패를 부렸으며 "비록 임해군과 정원군의 행패에 미치진 못했지만(雖不及臨、定兩宮)"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다고 했다. 정원군의 행패보다 덜했지만 정원군은 왕의 사친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그럴싸하게 포장되었다는 점에서 순화군은 조금 억울한 면이 있다.
스티커 이미지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정원군이 가장 나쁜 사람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대체 정원군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실록에 따르자면 오늘의 주인공 정원군 역시 선조의 장자인 임해군과 6번째 순화군을 능가할 정도로 성격이 포악하고 방탕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예를 선조실록에서 인용해보자.
헌부가 아뢰기를,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의 궁노(宮奴) 5∼6인이 창기(娼妓)를 끼고 거리를 횡행할 때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의 궁노를 만나 서로 다투다가, 이어 저희 편 궁노를 모두 거느리고 불을 밝힌 채 몽둥이를 들고서 하원군 부인의 집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심지어 부인을 데리고가 정원군 집의 문 앞에 가두기까지 했는데, 영제군(寧堤君) 이석령(李錫齡)·익성군(益城君) 이향령(李享齡) 등이 울면서 애걸하자 그때서야 겨우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부인이 살고 있는 곳은 다른 궁가에 비할 바가 아닌 대원군(大院君)의 신위를 봉안한 곳이니 정원군이 하원군 부인을 이렇게 대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보고 듣기에 말할 수 없이 놀라우니 정원군 부는 파직하고 난동을 일으킨 궁노들은 나국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은 극히 해괴하다. 살펴서 조처하겠다."
하였다.
○憲府啓曰: "定遠君琈宮奴五六人, 狹娼橫行於街路之際, 與河原君 鋥宮奴, 相詰, 仍盡率其宮奴, 明火持杖於河原夫人之家, 夫人至被拘鎖於定遠之門。 寧堤君 錫齡、益城君 享齡等, 涕泣哀乞, 僅得脫還。 夫人所寓, 非他宮家之比, 乃大院君神位奏安之所, 而定遠之待河原夫人, 不當若此。 凡在瞻聆, 莫不驚愕。 請定遠君 琈罷職, 其宮奴作亂者, 拿鞫定罪。" 答曰: "此事極駭。 當察而處之。"
(선조실록 154권, 선조 35년 9월 13일 임신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09013_002, 자료제공).
아버지 선조의 형수이자 덕흥대원군의 첫째 아들이었던 하원군(河原君)의 부인을 납치하는 패륜을 저지른다. 왕족의 신분을 망각한 채 노복들과 창기(娼妓) 대여섯을 데려가서 혈연으론 큰어머니가 되는 하원군 부인을 자기 집까지 끌고 갔다가 다른 종친들이 눈물로 호소하자 겨우 풀어줬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큰어머니를 납치한 것일까? 물론 실제로 납치한 것은 정원군이 아니라 그의 노복들이었지만, 분명 정원군이 시킨 일일 것이다.
사간원에서 ‘인간의 도리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소리 높여 비난했으나 선조는 “살펴서 조치하겠다”며 어물쩡 넘어가려고 했다. 다음 날 이 사실을 안 정원군은 본인은 절대 모르는 일이었다고 둘러댔으며 오히려 밤늦게까지 돌아다닌 하원군의 부인 입장만 난처해졌을 뿐 아니라 이 사실을 보고한 관리들도 모두 파직되었다고 하니 볼썽사나운 조선의 대표적인 적반하장 사건이 아닐까 싶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에게만 신경을 쓴 것은 능양군의 부친이 정원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정원군은 만백성의 원한의 표적이었지만 정권에 눈이 먼 서인들은 이런 정원군의 아들을 추대해 인조반정을 일으켰으니 한심할 따름이다(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63714, 참고).
보통의 경우 세자는 물론이고 그 이외의 왕자들도 특별히 행동거지를 조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임해군, 정원군, 순해군이 그토록 포악한 패륜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였던 선조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왕 가운데 고종과 함께 가장 무능한 왕으로 알려진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임금의 이 물러터진 자식사랑이 나라를 병들게 만든 제1원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조 임금에 대해서는 목릉 답사 때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광해군 즉위 후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가 셋째 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로 인하여 커다란 옥사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지에서 자결하였고, 정원군은 그의 화병으로 1619년(광해군 11)에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으로 첫째 아들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사친으로 정원대원군에 추존되었으며,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정통성 문제로 인해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인헌왕후 구씨(재세 : 1578년 음력 4월 17일 ~ 1626년 음력 1월 14일)는 본관이 능성인 능안부원군 구사맹과 평산부부인 신씨의 딸로 1578년(선조 11)에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에 선조의 아들 정원군(원종)과 가례를 올려 연주군부인에 봉해졌다. 원종 사이에서 3남(인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낳았다. 1623년(인조 1)에 첫째 아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연주부부인에 책봉되고 계운궁(啓運宮)이라는 궁호를 받았다. 이후 1626년(인조 4)에 경덕궁(경희궁) 회상전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1632년(인조 10)에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자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70&mn=RT_01_16_01, 자료제공).
그럼 김포장릉으로 들어가 보자.
경기도 김포시 장릉로에 위치한 장릉
장릉의 안내도
이번 왕릉답사는 호지프 대원들과 함께 했다.
이곳이 김포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
물푸레나무과인 미선나무. 세계적으로 충북과 전북 일부에만 자라는 귀한 우리 나무. 열매의 모양이 둥근 부채를 닮았다고 해서 미선이라고 한다. 실제로 보니 엄청 예뻤다.
"공무" 완장을 차고 미선나무 앞에서...^^ 보통의 경우에는 목에 거는 명찰을 주는데 이곳 김포 장릉에서는 샛노란 완장을 줬다.
늘 그렇듯이 왕릉으로 가는 길은 단아하고 엄숙하다.
금천교에서 홍살문으로 이어지는 길.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직선으로 난 나즈막한 경사에 계단을 두었다. 계단 간격이 넓어 성큼성큼 올라갔다. 초등학생에게는 넓다고 느낄 정도이다.
아주 깔끔하게 관리된 참도
이렇게 깨끗하게 정돈된 판위는 처음 보는 것 같다. 물론 이후에 새로 만든 것이겠지만, 보기에 좋다. 공릉의 판위를 생각하면 카펫 수준이다.
이곳의 주인공의 이미지와는 달리 굉장히 관리가 잘 되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꾸준한 개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인상이다.
어색하게 새롭게 단청한 것도 아니고 뭔가를 보수한 것도 아닌 듯 그저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수복방의 모습.
정자각에서 바라 본 능침.
신계와 어계의 모습. 보통의 신계보다는 넓은 편이고 소맷돌은 섬세하지는 않았지만 단아한 모습이다. 주춧돌의 높이 때문에 두단 뿐인 어계. 보통은 삼단인 경우가 많다.
판위의 장석처럼 정자각의 바닥도 아주 깨끗하게 깔려있었다. 만약 이렇게 만들 수만 있다면 다른 왕릉의 판위와 정자각의 바닥도 이렇게 깔았으면 좋겠다. 옛스러우면서도 잘 정돈된 느낌이다.
조선국 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 부좌
비각 안에는 한 기의 표석이 있는데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세운 표석이다.
비각 옆에는 육경원(毓慶園, 인헌왕후의 추존 전 원의 이름)으로 있을 때 사용한 비석 받침돌이 장릉 근처에서 노출되어 발굴 후 전시되어 있다.
육경원 시절에 묻혀 있던 비석 받침돌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유리관을 덮어두었다. 무척 섬세한 배려에 놀랐다. 그래서인지 우리 일행이 다가서니 어디선가 나타난 관리소 직원 한분이 답사 내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조금 불편했지만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비각의 뒷편에서 찍은 모습. 지금까지 답사한 왕릉 중에 비각 옆에 다른 상설을 본 적이 없었다.
능상에서 방귀버섯을 발견했다. 무지막지하게 뿜어대는 이 녀석의 포자를 비닐에 잘 담아왔다.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는 조만간 포스팅 할 예정이다. 왕릉 답사의 묘미 중 하나이다.
멋드러진 소나무 옆으로 난 길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유난히 왕릉 관리에 적극적인 분들이라 여간 불안해 하지 않으셨다.^^
정자각 위에 놓인 어처구니들.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순이다.
능상에서 바라 본 정자각과 비각 그리고 수복방의 모습. 멀리 보이는 아파트의 모습과 하늘 위로 쉴 새 없이 날아다니는 여객기의 소음으로 어수선했다. 아들 인조의 파주장릉은 뱀 때문에 천장했고 아버지 원종의 장릉은 비행기 소리로 1년 내내 조용한 적이 없으니 과연 왕릉으로서 명당인지는 모르겠다.^^
능침 공간에 올라가면 항상 먼저 절을 하고 답사를 한다.
장릉은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장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원종, 오른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만이 둘러져 있는데, 이는 원종이 왕으로 추존 되기 전 흥경원을 조성할 때의 호석이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는 원종이 왕으로 추존된 이후에 새로 설치한 석물이다.
곡장 뒷편에서 바라 본 봉분과 석물들.
다른 왕릉과는 달리 곡장 뒤편이 높지 않았다. 이 또한 산릉도감에 의한 것인가?
이번 김포장릉의 능침공간에 들어서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문무신석의 크기에 압도당했다는 점이다.
특히 육경원과 흥경원 시절에는 없었던 무인석은 장릉으로 추존되면서 생겨났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문인석과는 조금 상이한 곳이 있다. 첫번째로는 고종의 왕릉에서 보여지는 무인석의 꽃무늬장식이 이때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문인석과는 달리 볼륨감있는 오동통한 손이 인상적이다. 크고 무뚝뚝한 얼굴에 내리 꽂은 칼의 장식에서도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무인석은 얼굴에 총탄 같은 상흔이 보인다. 아쉽지만 그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으니 섣불리 복원해서는 안될 것으로 믿는다.
무인석의 칼 장식. 고석에 있는 귀면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칼날을 귀면의 혀처럼 조각한 센스가 돋보인다.
거대한 홀을 들고 있는 문인석도 낯설게 느껴졌다. 무인석에 비해서 손이 무척 넓적하고 평면적이다.
김포장릉의 문무신상의 특징은 첫째 너무 깨끗하다는 점이다. 흡사 최근에 만든 것처럼 느껴진다. 두번째로는 좌우의 석물이 한결같이 닮았다는 점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두명 이상의 석공이 만드는지 얼굴도 조금씩 차이가 났는데 이곳에는 좌우의 문무신상의 얼굴 표정까지도 완벽하게 닮아있어 신기했다.
이 석마의 경우처럼 햇볕이 드는 부분과 그늘진 부분은 지의류의 도포 정도가 확실히 달랐다.
또한 석마의 얼굴 표정도 무척 섬세하다. 특히 입부분의 디테일한 조각은 인상적이다. 석마의 다리 아래 부분도 뻥 뚫려있다.
8각형 4각화창의 장명등. 사실 이곳 김포장릉은 시기구분상 3기에 해당하므로 4각석등이 등장하는데 이곳에서는 여전히 2기의 장명등의 특징인 8각석등이다.
지붕이의 이음새 부분이 훼손된 흔적이 보인다.
화창으로 내다 본 정자각. 대부분 화창으로 정자각으로 보면 조금 삐뚤게 보인는데 이곳에서는 거의 일직선으로 형성되어 있다.
망주석. 세호에 구멍이 사라지는 시기인데 이곳은 여전히 구멍이 남아있다. 그 시기 구분은 대략적인 것이지 모든 경우의 수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세호에 난 구멍이 선명하다.
아쉬운 분단 민족의 아픔을 보여주는 혼유석의 총탄자국.
귀면은 무척 우락부락하게 생겼지만 결코 무서울 수 없는 그런 귀여운 표정을 간직하고 있다.
유난히 넓적하고 큰 코와 과장된 눈, 그리고 불거진 이빨은 귀면의 일반적 특징이다. 다양한 표정의 귀면의 표정을 비교하는 것은 왕릉 답사의 매력 중 하나이다. 일부러 다르게 조각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귀면에서 다정스럽고 귀여운 느낌을 받은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독특하고 차별적이다.
장릉 고석의 가장 큰 특징은 귀면이 다른 곳보다 유난히 양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혼유석과 봉분 사이에 파묻힌 이름 모를 석물들
혼유석 아래에만 덮개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장릉에는 좀 특이한 석물들이 혼유석과 봉분 사이에 파묻혀 있다. 너무 궁금해서 장릉 측에 문의를 했더니 문화해설사님의 친절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원래 장릉의 전신이었던 흥경원과 육경원 시절에 있었던 비석과 비석의 받침대를 이곳에다 묻어두었다고 한다. 1626년(인조 4), 1627년(인조 5), 1632년(인조 10) 총 세번에 걸친 천장을 거듭하며 장릉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비석과 그 받침대를 그냥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산릉도감에 명시되지 않았겠지만 당시의 시대적 혹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융통성있게 상설한 점 또한 조선왕릉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종의 혼유석
인헌왕후의 혼유석
병풍석과 난간석도 없이 단지 호석으로만 둘러져있는 봉분의 모습이 낯설다.
바래고 깨진 호석은 물론이고
호석들 자체의 높낮이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랬는지 아니면 추후 보수한 부분인지 궁금하다. 호석의 깨진 부분에 쐐기돌처럼 잘 박아두었다.
석양은 꽤 큰 편이고 석마처럼 다리 아래가 오픈되어 있다.
장릉의 석물들은 하나같이 깨끗하게 보존된 상태이다. 둘로 갈라진 석양의 발톱마저 선명하다.
꼬리를 내린 석호의 상태는 너무 양호해서 마치 작년에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특히 다른 왕릉의 석호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화강암의 상태가 좋아보인다. 이 돌 자체가 강화도의 해명산의 것인지 양주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느 왕릉의 석재보다 좋은 것을 사용한 것만은 틀림없다.
툭 불거진 눈과 넓직한 입. 짙은 눈써버과 굵직한 수염. 거기에 비해 다소곳해보이는 콧구멍.
가지런한 치열 사이에 양쪽으로 삐쭉 튀어나온 송곳니 각 2개씩. 몸에 비해 큰 머리가 오히려 귀엽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발톱의 표현도 다른 석호들에 비해서 굉장히 섬세한 편이다.
석양에 비해 월등히 좋아보이는 석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봉분 뒤편에서 바라 본 장명등과 정자각. 대체로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자각 뒷편에서 능침으로 올라가는 신교. 기존의 신교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바닥에 묻힌 상태의 산신석. 원래대로라면 제물을 올릴 수 있도록 위쪽으로 튀어나와야 한다.
삐뚤한 예감의 모습. 본래의 돌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상단 부위가 닮아있다.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이런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이 재실을 관리사무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정문에 현대식 건물로 관리사무실을 지었다. 다시 일반인에게 공개할 수 있도록 보수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재실을 관리사무소로 사용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에는 재실 자체가 출입금지 구역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공개할 준비를 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인조의 파주장릉과 원종의 김포장릉, 아들과 아버지의 왕릉을 답사하는 날만 추적추적 비가 온 것은 결코 우연같지 않았다.
윤관우 기자
글쓰기 평가현수랑 기자2016.04.29
이번 기사 역시 현장에 함께 다녀온 듯 생생하고 흥미로웠어요. 관우 친구의 지식과 꼼꼼함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네요 ^^
기사 내용에서 <사람이 죽은 다음 그 사람의 됨됨이를 기록한 것이 졸기이다.>라는 내용이 중간에 들어가 있는데 졸기와 같은 어려운 용어는 처음 나올 때부터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어떨까요? 방귀버섯의 포자를 관찰한 기사도 기대할게요 ^^
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