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박사

2023.07.30

안녕하세요? 배유진 기자입니다.



오늘은 우장춘 박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11년 우장춘은 구레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우장춘이 졸업할 무렵, 조선 총독부에서 도쿄 제국 대학 농학부에 진학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우장춘은 1916년 도쿄 제국 대학 농학부에 들어갔습니다.우장춘은 일본 농림성 농사 시험장에 취직했습니다.



우장춘은 나팔꽃에 관한 연구를 했습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서 도쿄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 사람이 불을 질렀고 도둑질을 했다는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 중 몇몇은 자경단이라는 폭력 집단을 만들어서 한국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우장춘은 옆 집 아이의 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옆 집 아이의 이모, 고하루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1926년 우장춘은 가족과 함께 고노스 농장으로 이사했습니다.



농장이 불에 타버려서 우장춘의 나팔꽃에 관한 논문이 타버렸습니다.



우장춘은 유채 종자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장춘은 씨앗의 품종 개량에 힘 썼습니다.



우장춘은 서양 유채 씨앗으로 꽃가루를 고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장춘은 빨리 거두고 수확량도 많은 종자를 개발했습니다.



우장춘은 박사 학위 논문에서 재래종 씨앗을 교배해서 새 식물을 만들고 그것이 유전적으로 어떻게 가능한 지 밝혀냈습니다.



그리하여서 우장춘은 농학 박사가 됐습니다.



우장춘은 다키이 종묘 회사로 옮겼습니다.



우장춘은 채소들의 종자 개량을 연구했습니다.



1945년 우장춘은 '채소의 육종 기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1950년 우장춘은 조국으로 갔습니다.



우장춘은 일본에서 보낸 100만엔을 모두 연구 재료를 사는데 활용했습니다.



우장춘은 1950년 한국 농업 과학 연구에 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1953년 봄, 우장춘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우장춘은 병이 없는 씨감자를 생산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1959년, 농림부 장관이 문화 포장을 전달하고 기념메달을 우장춘의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우장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 사람이 필요한 것을 연구하는 우장춘 박사님, 참 멋지신 것 같습니다.



 



 



 



                                                                                       이상 배유진 기자였습니다.



 



 



 



 


글쓰기 평가어린이과학동아 기자2023.07.30

우장춘 박사님의 과학적 업적 뿐 아니라 일제 시대에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나 두 나라 사이에서 고충을 겪으셨다는 점도 친구들의 글을 통해 많이 알게 되었어요. 고국에 자신의 연구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던 박사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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