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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의 시해 사건의 증인 사바틴
안녕하세요. 박정안 기자입니다.
오늘은 제가 명성황후에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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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인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들이 경복궁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사사건건 눈엣 가시와 같은 명성황후를 없애기 위해서 였습니다. 먼저, 일본인들은 궁궐을 지키던 훈련대장 홍계훈을 죽인 다음, 곧바로 건청궁으로 달려가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살해했습니다. 이어 옥호루에 숨어 있는 명성황후를 잡아끌어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짓밟고는 칼로 찔렀습니다. 이때 두려움에 떠는 궁녀들도 사정없이 마구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고는 명성황후의 시신을 궁궐 안 숲에서 기름을 끼얹고 불에 태운 다음, 남은 재를 연못에 뿌리고, 다른 시신들은 궁궐 밖으로 몰래 싣고 나가 흔적 없이 처리했습니다. 이 사건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또는 '을미사변' 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야만적인 짓을 저지르고도 이 일을 꾸민 일본의 미우라 공사는 고종을 찾아가 "대원군과 훈련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통에 왕비가 도망쳐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건을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종의 비밀 경호원이었던 러시아의 사바틴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시해 장면을 본 직후 일본인에게 붙잡혀 내쫓겼는데, 1995년에 러시아에서 발견된 그의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합니다.
"옥호루의 마루에는 일본도를 찬 20~25명의 일본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방 안팎을 뛰어다니며 여인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나와 마루 아래로 내던지고 발로 걷어찼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렇게 명성황후를 죽인 일본의 만행이 밝혀졌습니다.
다시 잠시전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일본은 미우라와 낭인들 47명을 전부 불러들여 재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모두 풀려났습니다. 그렇게 미우라 등은 잔인한 만행을 저지르고도 멀쩡히 석방된 것입니다. 명성황후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하응)과 맞서고 남편인 고종을 뒷전으로 밀어낸 나쁜 며느리였을까? 아니면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애국자였을까?
명성황후란 명칭은 후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기 때문에 붙은 것입니다. 명성황후는 분명 세도정치를 펼쳤고, 정권을 놓고 흥선대원군과 맞서는 등 잘못한 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에 대한 나쁜 평가는 일본에 의해 많이 부풀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명성황후는 개방을 통해 조선을 근대화시키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힘이 너무 약해 청과 러시아에 의지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왕실의 위엄을 지키는 것이 곧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 믿고 고종을 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명성황후는 대단히 영리하고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그 시절에 나라가 힘이 없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가 잘 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문헌-<동학 농민의 운동과 개혁의 추진>
글쓰기 평가어린이과학동아 기자2018.02.13
정안 기자, 반가워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아주 구체적으로 잘 정리한 글이네요. 아마도 관련된 책을 읽은 것 같아요. 표현도 매우 사실적이고, 당시의 상황을 문장으로 생생하게 잘 묘사해 주었어요. 마치 눈 앞에 그림을 그리듯 말이에요.
안타까운 역사의 한 장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자신의 생각도 드러낸 멋진 글이었어요. 다만 정안 기자의 생각이 좀 더 지금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났더라면 더 좋은 글이 되었을 것 같아요. 정안 기자의 생각이 글의 맨 마지막에 몇 문장으로 다 정리된 점이 조금은 아쉽네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긴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문장도 매끄럽고 문법적인 실수도 거의 없는 완성도 높은 글을 써 주었어요. 앞으로도 좋은 글로 자주 만나길 기대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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