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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나의 조선왕릉 답사기, 제3회 파주 장릉을 다녀오다 누구를 위한 반정인가? 굴곡진 삶을 오롯이 닮은 인조 이야기
기자는 지난 11월 30일 파주 장릉을 다녀왔어요. 파주 장릉은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재위 1623∼1649)임금과 부인 인열왕후(1594∼1635)의 무덤입니다. 사적 제203호로 지정된 장릉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 25-1번지에 위치해있어요. 장릉의 능역은 10만평이 넘지만 장릉 하나만 달랑 조성되어 있어 단아하지만 외로운 느낌마저 들었어요. 게다가 그날은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바람에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곡장 뒷편에서 바라 본 파주 장릉. 소리없인 내리는 부슬비와 자욱한 아침 안개가 인조임금의 삶처럼 처량하게 느껴졌어요.
인조는 추존왕인 원종의 아들이며 선조의 손자로서 선조 40년에 능양군에 봉해지고 광해군 15년 3월에 이귀, 김류, 이괄 등 서인들이 새 임금을 세우려고 일으킨 인조반정(1623)에 성공하여 왕위에 올랐어요. 하지만 인조는 재위 기간 중 인조 2년(1624)에 반정공신들의 세력다툼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이괄의 난(1624)과 인조 5년에는 정묘호란(1627)을 겪었던 임금입니다. 또한 인조 14년(1636)에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가 청나라와 강화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궁궐로 돌아왔죠. 인조는 재위 27년(1623∼1649)간 한 번의 내란과 두 번의 호란을 치르면서 많은 치욕과 고생을 겪다가 55세로 돌아가셨어요. 또한 인렬왕후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로 선조 27년(1594)에 원주에서 태어나 광해군 때 능양군과 혼인하고 인조 원년(1632)에 왕비가 되었으며 효종, 소현세자, 인평대군과 용성대군을 낳았으며 인조 13년(1635)에 돌아가셨습니다(문화재청자료 참고).
병자호란이 끝나고 인질로 잡혀갔던 두 왕자는 돌아왔지만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양국을 오가며 온갖 고생을 마다않고 뛰어난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은 바로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임금의 아우인 인평대군이었답니다(인평대군에 대해서는 본 기자의 기사:http://junior.dongascience.com/news/view/press/1613/index?pg=2&를 참고).
조선시대에 쿠데타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난 왕은 노산군(뒤에 단종), 연산군, 광해군 등 세 명이었어요. 이 가운데 ‘반정(反正)’ 즉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왕이 교체된 것은 연산군을 폐한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폐한 인조반정입니다. 그런데 반정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왕위에 오른 과정을 보면 중종과 인조는 아주 달랐어요. 중종이 정변을 일으킨 공신들의 추대로 갑자기 왕위에 올랐다면, 인조는 왕이 되고자 몸소 정변을 준비하고 앞장선 인물이죠(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3418 참조).
폐위된 왕의 입장에서 보면 두 경우 모두 반역이라고 볼 수 있지만, 민생안정과 종묘사직을 보존한다는 명분 면에서는 아주 큰 차이가 있어요. 이 점에 유의하면서 같이 살펴보기로 해요.
인조임금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그 어느 임금에게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그리고 병자호란까지 모두 3번이나 몽진을 떠났다가 다시 환궁하는 초유의 사태를 당한 유일한 임금이었죠. 1624년 반정에 큰 공을 세웠으나 조정의 대우가 그의 뜻에 차지 못하였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잠시 공주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이 이를 격파한 뒤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한갓 무인이 일으킨 내란으로 임금이 파천까지 하였으니 누군가 그 책임을 물어야 했을 겁니다.
헌부와 간원이 합사(合司)하여 아뢰기를,
“도원수 장만(張晩)의 죄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군사를 거느리고 머뭇거리다가 적을 임금에게 맡겨 마침내 종묘 사직이 파천하게까지 하였으니, 군율로 논하여 단연코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속히 율에 따라 처단하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인조 4권, 2년(1624 갑자 / 명 천계(天啓) 4년) 2월 12일(병신) 9번째기사, 참고)
이괄의 난을 제압해야 할 장만이 머뭇거리다 임금이 파천까지 갈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죄를 물어 처단하자는 사헌부의 말을 인조가 기꺼이 따랐다면 어찌되었을까요? 반정 당일날 반정대장으로 지목되었던 김류가 소극적으로 나오자 우왕좌왕하던 반정의 무리들을 일거에 컨트롤하여 반정을 성공으로 이끈 자가 바로 이괄이었어요. 선조 때 어린 나이에 선전관까지 지낸 이가 바로 '이괄'이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아마 인조는 이괄이라는 또 다른 반정의 무리에 의해 폐위되고 광해군이 다시금 왕위에 오르는 세계사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쿠데타에 성공한 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 역시 쿠데타이기 때문이죠.
인조가 환궁하여 장만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그 노고를 치하하는 장면을 보면 그의 심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상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비국(備局)의 당상과 서방에서 온 장사(將士)를 인견하였다. 장만(張晩)이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고 곤외를 전제(專制)하였으나 적을 막지 못하여 승여(乘輿)가 파천하게 하였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야 하지만, 다행히 여러 장수들이 명을 따라 주었으므로 회복하는 공적을 조금 이루었습니다. 적병은 1만 수천인데, 신의 휘하에는 본디 군졸이 없었으므로 며칠 동안 규합하여 겨우 수천을 얻었습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일이 헤아릴 수 없게 될 것이므로, 이에 계략을 써서 간첩을 보내어 적으로 하여금 스스로 무너지게 하였더니 4천의 군사가 일시에 모두 흩어졌고 이런 뒤로부터 그 형세가 약해져 마침내 패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역적 이괄(李适)이 곧바로 쳐들어 올 때에 경이 즉시 나아가 싸우지 않는 것에 대해 늘 한탄하였는데, 이제 경의 말을 들으니 중과부적이어서 그러하였다. 마침내 승리하여 서울을 수복하는 데 있어 열흘도 걸리지 않았으니 이것은 경이 당초에 계략을 써서 마침내 힘껏 싸운 공로에 힘입은 것이다.
○上御資政殿, 引見備局堂上及西來將士。 張晩曰: “臣受命專閫, 不能御賊, 以致乘輿播越, 臣罪萬死。 幸賴諸將用命, 粗效克復之績耳。 賊兵一萬數千, 而臣之麾下, 則素無軍卒, 數日紏合, 僅得數千。 萬一蹉跌, 事必不測, 是以行計間諜, 使賊自潰, 四千之兵, 一時皆散。 自此之後, 其勢削弱, 終至於敗耳。” 上曰: “當初賊适之直擣也, 每恨卿不卽進戰。 今聞卿言, 衆寡不敵而然也。 終能一捷收京, 不淹旬日, 正賴卿當初行計, 畢竟力戰之功也。”
인조 4권, 2년(1624 갑자 / 명 천계(天啓) 4년) 2월 23일(정미) 3번째기사, 장만·신흠·윤방 등과 싸움의 공로에 대해 논의하다
도원수 장만에게 역적 이괄의 군중에서 역적을 베어 바치는 자가 있으면 직의 유무와 공천(公賤)·사천(私賤)을 막론하고 1등에 녹공(錄功)하고 1품에 제직(除職)하겠다는 뜻을 널리 전하라며(인조 4권, 2년(1624 갑자 / 명 천계(天啓) 4년) 1월 24일(기묘) 7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참고) 부산을 떨던 인조에게 이괄의 난을 진압한 장만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을까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마자 도원수로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임금을 몽진으로까지 내몰았던 일을 꽤씸하게 여겼으나, 막상 난을 진압하고 돌아온 장만을 보니 중과부적이었던 형세를 들면서 오히려 큰 박수를 쳐줍니다. 그런 인조의 모습을 생각하니 인턴과정을 겪지 않아서 그런지 뭔가 언행이 일관됨이 없는 등 모든 거조가 제왕으로서는 부족함이 있어 보입니다.
왕위에 올라 광해군을 폐하던 그날을 돌이켜 보기로 해요.
이에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세조가 즉위하여 노산(魯山)을 폐했고, 중종께서께서 반정한 후 역시 연산을 폐하였으니, 이는 모두 종사와 신민을 위한 대계입니다. 폐(廢)자를 내리지 않고는 다시 적합한 말이 없으니,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는 일이 일각이 급합니다. 속히 결단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비로소 허락하였다(인조 1권, 1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3월 14일(갑진) 4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 참고).
세조가 단종을 내치고 중종이 연산을 내몰아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니 인조 역시 광해를 내쫓아 성군이 되라는 김류의 부추김을 인조 자신은 얼마나 기다렸왔을까요? 잠시도 망설이고 싶지 않았으나 자전께 여쭈어 처분하겠다며 한번 빼다가 냉큼 허락하였어요. 하지만 세조와 중종과는 달리 험난한 사건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인조는 과연 예감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반정이란 바른 것으로 되돌린다는 뜻인데, 과연 인조는 무엇을 되돌리려고 했던 것일까요?
인조대왕의 행장에는 인조의 반정의도가 변명처럼 구구절절 적혀있어요.
광해의 혼란이 더욱 심해져서 정사(政事)가 뇌물로 이루어지고 끊임없이 거두어들이며 토목 일이 해마다 잇따르고 그치지 않아 도감이라 칭하는 것이 열둘이고 민가를 헌 것이 수천 채였다. 모후(母后)를 유폐하고 골육을 도살하며 큰 옥사를 꾸미니 억울하게 죽는 자가 날로 쌓였다. 음란하고 포악한 행위가 이루 셀 수 없으며 척리(戚里)가 권세를 구하고 간흉(奸兇)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므로 모든 백성이 물이나 불 속에 있듯이 근심하였다. 왕이 아직 임금이 되기 전에 때를 기다리고 한가히 있으면서 깊이 근심하였다. 윤기(倫紀)가 무너진 것을 아파하고 종사(宗社)가 엎어지려는 것을 괴로워하여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 반정(反正)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여기셨다
光海昏亂益甚, 政以賄成, 聚歛無藝, 土木之役, 連年不息, 稱都監者十二, 撤民家者數千區。 幽廢母后, 屠戮骨肉, 羅織大獄, 冤死者日積。 淫暴之行, 難以悉數, 戚里招權, 奸兇擅柄, 一國之民, 嗷嗷然如在水火。 王龍潛時, 晦燕居深憂, 痛倫紀之已斁, 悶宗祊之將覆, 以撥亂反正爲己任。
(인조대왕행장 참고).
하지만 반정 이후 정권의 안정을 꾀한다는 명분으로 2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숙청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당시 89세였던 북인의 영수 정인홍도 서인들의 모략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인조반정이 정말로 정당하고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이처럼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유지했을 이유가 없어요. 또한 실제로 하루가 멀도록 소요가 끊이질 않았으며 반정공신들은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며 온갖 횡포를 부렸다고 하니 제대로 된 명분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 가운데 광해군 시절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홀로 벼슬을 버리고 도봉산에서 은거하여 반정 서인들로부터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은 피했으나, 이후 광해군의 복위를 꾀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아들과 함께 사형당한 유몽인의 시 한편을 읽어볼까요.
孀婦詞(상부사)
柳夢寅(유몽인)
七十老孀婦 칠십노상부
端居守空臺 단거수공대
頗頌女史詩 파송여사시
稍知姙姒訓 초지임사훈
傍人勸之嫁 방인권지가
善男顔如槿 선남안여근
白首作春容 백수작춘용
寧不愧脂紛 영불괴지분
칠순의 늙은 홀어미
홀로 빈방을 지키며 사네
女史의 시도 읽어봤으므로
지켜야 할 지조가 뭔지는 알고 있다네
옆에서 재가하라 권하네
의젓하고 좋은 사내 있다고
백발에 신부 같이 얼굴을 꾸민다면
연지 곤지 어찌 부끄럽지 않을까
혼자 살았으면 살았지 이 나이에 새로 시집가겠다고 화장한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은유적으로 들려주고 있어요. 죽음을 앞둔 유몽인이 광해군에게 충절을 지키겠다는 결의가 느껴져 숙연해집니다.
인조임금은 광해군 때와는 달리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을 취하는 바람에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게 되자 형제의 의(義)를 맺는 정묘호란을 겪게 됩니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다시 친명적(親明的) 태도를 취하게되자,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친 태종이 이를 빌미로 삼아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어요.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지만 결국 패하여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하며 굴욕적인 군신의 의를 맺게 되죠. 이 병자호란의 댓가는 혹독했는데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게 됩니다.
1645년 볼모생활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원인 모를 병으로 죽었을때, 마땅히 세자의 자리는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돌아가야했지만, 인조는 난데없이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강씨(姜氏)를 사사(賜死)하는 비극을 일으킵니다.
강씨의 부덕하고 추악한 일련의 소행에 대해 참을만큼 참았다는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 당장 강씨의 폐출과 사사를 명하게 됩니다. 그 명이 너무나 완고한 나머지 대부분의 신하들이 거역하지 못하였으나, 완성부원군 최명길이 차자를 올려 말하길,
선왕(先王)의 법에 무릇 죽을 죄가 있으면 반드시 삼복(三覆)한 다음에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중시해서인데, 더구나 지친(至親)에게 어찌 이와 같이 빨리 할 수가 있겠습니까?......이미 폐출된 뒤에는 조종(祖宗)과 신민(臣民)이 함께 버린 바로서 윤기(倫紀)에 죄를 얻은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므로 살려 두더라도 무엇을 할 수 있겠으며 처치하더라도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오늘날 뭇사람들의 뜻은 폐출하는 데에 대해서는 옳게 여기지만 사사하는 것에 대해선 옳게 여기지 않는 것이니, 억지로 시행한다면 후회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상이 그전에 한 말을 변경한 것에 노하여 답하지 않았다
○完城府院君崔鳴吉上箚曰:
......先王之法, 凡有死罪, 必三覆然後決之, 所以重人命也。 況在至親之間, 豈合如是急速?.....及其旣廢之後, 則祖宗、臣民所共棄絶, 不過爲得罪倫紀之一寡婦, 留之何能爲, 處之亦何難?...... 則是今之衆志, 允於廢而不允於死也。 强而行之, 恐未免於有悔......上怒其變說, 不報。
(인조 47권, 24년(1646 병술 / 청 순치(順治) 3년) 2월 20일(정유) 2번째기사, 참고)
선왕들께서도 사람을 사형시킬 때는 그 죄를 세번이나 숙고한 다음에서야 결정하는 까닭은 사람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겨서인데, 하물며 며느리의 일인데 어찌 이리 서둘러 결정하는 것인지에 대해 따끔하게 충고하고 있어요. 또한 모든 백성들이 폐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굳이 이렇게 급하게 사사까지 거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며 이미 소현세자마저 죽어 과부가 되어 폐출까지 당하는 이 마당에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느냐며 거듭해서 설득합니다. 먼저 폐출하여 왕실의 호적에서 깨끗하게 파낸 다음, 그래도 도저히 못참겠으면 그때가서 사사해도 늦지 않다며 구구절절 논리적인 어투로 설파하는 최명길의 차자에 대해 인조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어요. 전날 인조가 내린 어명에는 그러겠노라고 했다가 이제와서 다른 말 혹은 바른 말을 하는 최명길이 무척이나 미웠겠죠.
하지만 기이어 세자빈 강씨를 폐출함과 동시에 사사한 인조는 종묘와 숙녕전에 이렇게 고합니다.
이날 강씨를 폐출, 사사한 일로 종묘와 숙녕전(肅寧殿)에 고하였다. 종묘에 고한 글에,
“국가가 불행하여 변고가 대궐 안에서 발생했습니다. 강의 죄가 커서 가릴 수 없이 밝게 드러났습니다. 위호(位號)를 외람되이 칭하였고 위적(褘翟)을 미리 만들었으며, 흉한 물건을 파묻어 악한 짓을 하였고 독을 넣어 역심(逆心)을 드러내 떳떳한 윤리를 어지럽히고 없앴으니 무슨 짓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천지 사이에 용납하기 어려우며 귀신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였습니다. 죄가 종사에 관련되는데 사사로운 은혜를 어찌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의리에 따라 처단하고 그 연유를 감히 고합니다.”
하였다. 숙녕전(肅寧殿)에 고한 글에,
“난신 적자(亂臣賊子)는 시대마다 간혹 있기는 하지만 궁위(宮闈)의 변이 오늘날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폐출된 강이 역모를 자행하여 그 악이 가득 찼습니다. 비단 적의(翟衣)를 미리 만들었으니 반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이미 극에 달하였고,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었으니 화가 또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죽여야 된다고 말하니 하늘의 처벌을 회피하기 어려웠습니다. 의리로써 처단하니 계책이 후환을 염려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에 그 연유를 고하니 신께서도 함께 분노할 것입니다.”
하였다. 장령 박안제(朴安悌)가 지어 올렸다.【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을 것을 비망기에는 추측이라고 하교하였는데 제문(祭文)과 교서(敎書)에는 다 곧바로 단정하여 죄안으로 삼으니, 보는 이가 해괴하게 여겼다.】
○丙寅/是日以姜氏廢出、賜死事, 告宗廟及肅寧殿。 告宗廟文曰:
邦家不幸, 變出宮禁。 姜罪貫盈, 昭不可掩。 僭稱位號, 預造褘翟, 埋凶肆惡, 置毒逞逆, 亂常滅彝, 何所不忍? 覆載難容, 神人共憤。 罪關宗社, 私恩寧顧。 玆斷以義, 厥由敢告。
肅寧殿告文曰:
亂臣賊子, 代或有之, 宮闈之變, 莫如今時。 廢姜肆逆, 貫盈其惡。 預造錦翟, 將心已極。 埋凶置毒, 禍又不測。 國人曰殺, 天誅難逭。 斷之以義, 計出慮患。 玆告厥由, 神所共憤。
掌令朴安悌製進。【埋凶置毒, 備忘記猶以推度爲敎, 而祭文及敎書皆直斷爲案, 見者駭之。】
(仁祖 47卷, 24年(1646 丙戌 / 청 순치(順治) 3年) 3月 19日(丙寅) 1번째 기사, 참고)
사관의 눈에도 기이했던 이 제문은 뭔가 이상한 구석이 하나 둘이 아니었던 것이었겠죠. 또한 소현세자의 죽음을 두고 여러 설이 많은데요 사관의 말을 들어보면 그 직간접적인 원인과 당시의 상황을 쉽사리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소현 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전일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艧)2020) 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상의 행희(幸姬) 조 소용(趙昭容)은 전일부터 세자 및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 터라, 밤낮으로 상의 앞에서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서,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빈궁을 무함하였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는 곧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斂襲)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戊寅/行昭顯世子卒哭祭。 初, 世子在瀋陽時, 作室塗以丹雘, 又募東人之被俘者, 屯田積粟, 貿換異物, 館門如市, 上聞之不平。 上之幸姬趙昭容自前日, 素不悅於世子及嬪, 日夜媒孽於上前, 以詛呪不道之說, 構誣嬪宮。 世子東還未幾, 得疾數日而薨, 擧體盡黑, 七竅皆出鮮血, 以玄幎覆其半面, 傍人不能辨, 其色有類中毒之人, 而外人莫有知者, 上亦不之知也。 時, 宗室珎原君世完之妻, 仁烈王后之孽弟也。 世完以內戚, 與於襲斂, 見其異常, 出語於人。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 / 청 순치(順治) 2년) 6월 27일(무인) 1번째기사, 소현 세자의 졸곡제를 행하다
1645년 음력 2월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그해 음력 4월 26일에 창경궁에서 갑자기 사망했어요. 호시탐탐 청나라에게 설욕할 기회를 노리던 인조에게 청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돈독히하며 온갖 종류의 신문물을 접하고 또 그것을 귀국하면서 소개할 야심찬 소현세자가 탐탁했을리 없었겠죠. 결정적으로 청나라 황제가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한다는 소문에 밤잠을 설쳤을 겁니다. 왕이 되고 싶어 직접 반정을 일으켜 형을 폐하고 왕이 된 인조가 아들이라고 호의를 베풀리 없었어요. 결국 소현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긴 서인들의 모함과 인조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독살당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한 나라의 세자가 볼모로 잡혀가 오랜 시간 고생을 하다가 알 수 없는 병으로 급서했는데도 그의 아들에게 세자자리를 물려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손자 세명을 모두 제주도까지 귀향보내 죽이고, 소현세자빈까지 폐한 후 사약을 내려 죽음으로 내몰고 서적까지 모조로 불태운 인조의 비윤리적이고 비정상적인 의도를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정이 이처럼 명백한데도, 위에서 인용한 실록의 마지막 말처럼,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上)도 알지 못하였다(而外人莫有知者, 上亦不之知也).
고 한다면 너무 뻔뻔한 일이 아닐까요?
소현세자는 귀국할 당시에 친한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 J. A)을 통해 얻은 천문학과 수학, 천주교에 관한 서적과 지구의 등을 가지고 귀국했으나 급서하는 바람에 그 서적들은 모두 불태워졌다고 합니다. 어쩌면 서양문물을 우리나라에 소개할 절호의 기회를 날린 셈이에요.
인조임금은 돌아가신 뒤에도 편히 쉴 수가 없었어요. 파주 장릉은 인조가 왕위에 있을 때 정한 파주 북운천리에 있었으나 영조 7년(1731)에 뱀과 전갈이 석물들 틈에 집을 짓고 있어서 현재의 장소로 천장하였어요. 당시의 사회적 정서적 상황들을 생각해 볼 때, 왕릉을 천장한 이유가 뱀과 전갈들 때문이라면 그것을 불길한 징조라고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풍수리지학상으로 굉장히 좋은 기운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에 인조가 생전에 미리 지정해 둔 곳일텐데 어찌된 것일까요? 즉위 다음 해부터 자신을 왕으로 만든 일개 신하로부터 역공을 받아 몽진까지 간 이력이 있는 인조로서는 결국 생전의 지관으로부터도 배신을 당한 셈입니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니 측은지심이 피어오릅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백성들도 내란과 두번의 호란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고생했겠지만 인조 역시 한 순간도 다리 뻗고 지내기는 커녕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을 겁니다. 광해군을 몰아냈으나 적자가 아니라는 정통성 문제와 병자호란 뒤에 청나라의 강요로 세자에게 강제로 왕위를 물려주게 되지는 않을까 하고 무척 불안해했을 겁니다. 인조임금 스스로 만들어 낸 고달픈 운명이었다지만, 소현세자와 강빈과 손자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정당성을 부여했던 인조에게도 이래저래 힘겨운 삶이었을 거에요.
어찌보면 가여운 인조임금을 대신해 작은 변명을 한다면, 병자호란 만큼은 인조때문에 일어난 전쟁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요. 당시의 청이 처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우호적인 누르하치에서 호전적인 홍타이치로 군주가 교체되었던 시기였어요. 또한 오랫동안 명과 전쟁을 치르느라 피폐해진 청나라의 군수물자와 인력을 보충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적절한 나라는 조선 뿐이었겠죠. 한마디로 말해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전쟁이었다고 봐도 무리는 없습니다. 인조임금 때문에라는 표현보다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외세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란 가능성도 간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또한 인조임금의 치적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인조는 1624년 총융청·수어청 등 새로이 군영을 설치해 북방과 바다를 튼튼히 했어요. 광해군 때 경기도에 한정적으로 실시한 요역과 공물을 쌀로 받는 미납화, 즉 대동법을 1623년에 강원도에 확대 실시하고, 점차 실시 지역을 넓혀 나갔습니다. 또한, 1634년 삼남에 양전을 실시해, 전결 수를 늘려 세원을 확보했어요. 세종 때 제정된 전세법을 폐지하고, 전세의 법적인 감하를 근본 취지로 하는 영정법과 군역의 세납화를 실시했습니다.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해 상평통보를 주조했어요.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북관의 회령 및 경원개시, 압록강의 중강개시가 이뤄졌으며 송시열·송준길·김육·김집 등 뛰어난 학자를 배출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마련하기도 했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010&cid=46622&categoryId=46622 참고)
비 때문인지 아님 인조의 고단했던 삶이 그대로 전해져서인지 추웠어요. 세번째 비공개릉인 장릉을 자세한 사진으로 만나볼게요.
장릉 입구에 걸려 있는 안내판. 이곳 철문에서부터 장릉 홍살문까지의 거리까지 친절하게 표기되어 있네요.
비가 와서 그런지 운치있는 조선왕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안내석.
이곳이 비공개릉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안내문. 기자는 효릉과 온릉에 이어 이곳 파주 장릉을 끝으로 비공개릉의 답사를 마쳤어요. 자주 오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어선지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더욱 애썼답니다.
이곳 파주장릉은 양주 온릉과 서삼릉 내 효릉과 더불어 비공개릉이에요. 문화재청의 <조선왕릉 공개 제한 지역 보존 관리 업무지침(조선왕릉관리소 예규)>, 제3조 공개제한의 기준에 따르자면,
조선왕릉은 보존 관리에 특별한 지장이 없으면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문화재보호법 제48조 제2항 및 궁·능·원 및 유적관람 등에 관한 규정 제4조 제1항에 따라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어 불가피하게 공개를 제한할 사유가 있을 경우 제한할 수 있다.
1. 사유지 내에 있어서 관람을 위한 진입 공간이 확보되지 않았거나, 주변의 장애물 등으로 인하여 관람객이 접근할 수 없는 경우
2. 고건물, 석조물, 전통 조경물, 관람 시설물, 소방 시설물의 수리·복원 공사가 전면적이고 장기간 시행되어 관람 환경에 영향을 미칠 경우
3. 관리 면적이 좁아서 관람 환경을 마련할 수 없는 경우
4. 자연 생태 환경(동물, 식생, 수문, 토양 등) 보존을 위해 필요한 경우
5. 산불이나 폭우·태풍 등 자연재해로부터 보존·보호가 필요한 경우
6. 다른 법에 따라 공개가 제한되는 경우
7. 그 밖에 조선왕릉의 보존과 훼손 방지를 위해 조선왕릉관리소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이렇게 옮겨 적고 보니 어떠한 경우에도 제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1번의 경우는 서삼릉 내의 효릉에 해당될 것 같아요. 답사한 결과 현재 파주의 장릉은 온릉과 마찬가지로 두번째 항목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2013년12월18일 보고자료에 따르자면 정자각이 후면으로 약간 밀렸으며 전면 기둥에 조류 피해가 발생하였고, 석물의 경우 전체적으로 고착지의류 등 생물피해가 확인되어 지속적인 관찰을 통한 조치방안의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석물들에 대한 사진설명에도 있지만 실제로 각종 석물들은 고착지의류로 인한 피해가 상당한 정도로 보였어요. 문화재청의 이유있는 기준이 있겠지만, 현재 비공개되어 있는 모든 왕릉들이 안전하게 보전될 방안을 마련하여 모든 국민들에게 공개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만을 희망해봅니다.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고 휭하고 가버린 관리인의 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어요. 사실 타고 싶었거든요.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휑한 잡초지와 물웅덩이만이 기자를 반겨주었어요. 비공개릉이라 그런지 곳곳에 잡초가 무성하고 물웅덩이도 두어군데 보입니다. 바로 옆 논과 경계를 이룬 저 철문아래로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바로 앞에 CCTV가 있어 몰래 접근하기는 어렵겠죠? 다른 비공개능에 비해서 이런 부분들은 좀 아쉽네요.
사적 제203호 장릉 표지석은 이끼가 피어 푸르스름하네요. 아마 쓰러진 표지석을 1992년 6월 11일에 보수했던 것 같아요. 아래 지반도 폭우 두어번이면 다시 쓰러질듯 위태해보입니다.
금천교의 모습이다. 금천교는 왕릉의 입구에 위치한 돌다리로 왕릉의 안과 밖을 구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다리 안쪽은 왕의 혼령이 사는 곳을 의미합니다. 금천이란 속세의 공간인 성역이 되는 작은 시내를 말하는데요, 여기에 놓인 다리는 말하는 것입니다.
홍살문에 살짝 기대어있는 소나무가 위태해보입니다. 인공 버팀목을 세워놓았지만 아래의 참도를 침범해 있어서 보기에 좋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고 소나무를 뽑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조선왕릉은 주위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이죠.
넓직한 참도가 평편하게 잘 조성되어 있어요. 파주 삼릉에 있는 공릉의 경우에는 너무 울퉁불퉁해서 등산화를 신고 걷기에도 힘들지경입니다.
능을 지키는 능참봉이 임시로 머물던 수복방의 모습입니다.
비를 맞아서인지 정자각의 단청들이 한결같이 떠 있었고 어처구니에서 흘러나온 녹물 탓에 조금은 지저분한 모습이었어요.
왼쪽이 신들이 넘나드는 신계, 오른쪽이 임금이 다니는 어계. 어계에 오를 때에는 오른발부터 한발씩 올라가고 내려올 때는 왼발부터 내려옵니다. 내려올 때는 서쪽의 어계를 이용해서 내려오면 되는데요. 서쪽에는 신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임금의 영혼은 정자각의 뒷편으로 나가서 능침으로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의 예법들은 매우 복잡하고도 엄하답니다.
제사를 마친 임금의 혼령이 능침으로 올라가는 전용 다리입니다.
제향 후 축문을 태우거나 묻는 용도로 사용했던 예감. 저 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산소가 스며들어 축문이 잘 타도록 만든 것 같았어요. 왕릉에 있는 것들은 다 의미와 용도가 있는 것이니 저 구멍에도 뭔가 재밌는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산신석은 거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가는 상흔이 꼭 남아있어요.
인조대왕과 인렬왕후의 신도비와 비문. 비각 안으로 들어가 찍고 싶었는데 규칙을 어기는 것 같아서 망설였어요. 하지만 아빠가 목마를 태워줘서 뒷 창살 너머로 찍은 귀한 사진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고착지의류가 생겨나면 제거하기가 어렵답니다. 대체 석물에 고착된 이 지의류는 어떻게 해결해야하면 좋을까요? 기자가 문화재청에 직접 문의해보니 현재로서는 아무런 해결방안이 없다고 해요. 장차 우리 기자단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무인석.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화강암으로 석인석을 제작하여 중국이나 베트남이 사용한 대리석에 비해서 은은하고 근엄해 보입니다.
석양의 모습. 석호와 비교해보면, 첫째는 서 있는 모습이고 둘째는 다리 사이가 뚫려있다는 점이 달라요.
무섭기는 커녕 민화에서 나올법한 석호의 모습은 석양과 달리 앉아 있으며 다리 사이가 막혀있답니다. 아마 저렇게 다리 사이를 막아두면 아무래도 세월이 지나도 덜 손상되는 것 같습니다.
우라나라 왕능에 동물상을 배치하는 관습은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성덕왕릉(736년경)의 네 귀퉁이에 사자를 배치한 것에서 시작되었어요. 고려시대부터 석사자 대신에 석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개성의 7릉군3릉에서 석양이 함께 등장했다고 합니다. 양은 온순함을 호랑이는 사나움을 강조하여, 음양의 기운을 조화롭게 만드는 상징적인 석물이라고 볼 수 있어요(자료제공, 문화재청).
오른쪽의 망주석에 비해 상태가 양호한 편입니다. 같은 날 조성된 석물들이 왜 이렇게 보존상태가 다른지 궁금해요. 특히 아래 망주석에 있는 세호의 경우는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요. 고착지의류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이미 제거작업을 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문화재청에 문의했더니 아래 석물에는 신기하게도 고착지의류가 생기지 않은 것이라고 해요. 신기하죠? 섬세하고 화려한 모습의 꼬리부분이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오른쪽 망주석의 세호와 조각이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세워진 석물을 각기 다른 석공들에게 맡겼을까요?
병풍석이 없는 왕릉은 있어도 난간석은 거의 모든 왕릉에서 발견됩니다. 시각적으로도 그렇고 기능적인 면에서도 봉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요.
전통적인 십이지신상이나 구름무늬가 아닌 모란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병풍석이 무덤을 두르고 있습니다.
병풍석의 중요한 요소인 인석은 병풍석 상단의 만석을 제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 중요한 인석이 여기저기 파손되어 있었어요. 기능적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어보이는데 이 석물들은 다 저마다 섬세하게 맞물려 있어서 하나라도 훼손되면 다른 것들도 다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서 관리해야겠습니다.
지대석이 아주 골르게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당시 석공들의 실력과 노고에 다시 한번 감탄과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인석은 커다란 사각기둥 형태로 모두 12귀퉁이에서 튀어나와 규화나 국화 또는 모란 같은 꽃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인조는 살아생전에 미리 자신의 능을 조성했어요. 이후 인조가 승하한 후, 효종이 그 자리에 인조를 장사냈으나 1731년 영조7년에 뱀과 전갈이 집을 지어 현재의 파주 장릉으로 천장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건원릉과 같은 석물을 본따서 만들었으나 이후 천장할 때 병풍석과 혼유석, 난간석과 장명등은 새로 만들었어요. 이때 병풍석에 새겨진 문양이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십이지신상이나 구름모양이었으나 이곳은 모란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어요. 한마디로 17세기와 18세기의 석물이 공존하는 색다른 왕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이지신상을 구름 속에 수관인신의 형태로 표현한 것은 봉분이 피장자의 영혼의 안식처임을 상징하는 것이에요. 하지만 이곳 장릉부터 바뀌게 된 모란꽃은 화려하면서도 전통적으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꽃이기 때문에 사용된 것입니다(자료제공, 문화재청).
장명등에 난 구멍으로 사방을 들여다보면 좌우 석물들의 위치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붕부분과 아래 기둥부분이 매우 상이해보입니다.. 기둥부분에는 지의류가 거의 보이지 않은 반면, 지붕부분은 덕지덕지 붙어 있어 뭔가 어색한 모습인데요, 같은 돌인데도 지의류가 고착되는 시기와 정도가 매우 상이합니다. 그래도 기둥부분이라도 깨끗하니 다행입니다.
인조와 인렬왕후가 합장된 능이라 혼유석도 두개로 조성되어 있어요. 왼쪽이 인조의 혼유석 오른쪽이 인렬왕후의 혼유석이라고 구분할 수 있겠죠? 실제로 이곳에 음식을 차리지는 않아요. 영혼들이 놀다가는 상석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두개의 혼유석을 받들고 있는 고석의 귀면도 각기 조금씩 상이한 모습을 하고 있어요. 기계로 찍어낸 것이 아니라 석공이 일일이 조각한 것이니 조금씩 다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곳 장릉의 고석은 확실히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적어도 두명 이상의 석공이 작업한 것으로 보여요.
곡장 뒷편에 있는 소나무들이 멋들어지게 조성되어 있네요.
곡장의 측면은 여러가지 이유로 손상되어 군데군데 보수한 흔적이 안타까웠어요. 사실 이런 손상들 중 상당부분은 6.25전쟁때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왕릉에 해를 입힐 생각을 했을까요.
봉분 근처에 피어있는 지의류와 석물에 붙어있는 고착지의류의 모습. 장릉에 있는 왠만한 석물에는 모두 이렇게 고착지의류가 심하게 피어있었어요.
비공개릉이라 그런 것이든 아니면 이런 상태라서 비공개릉이 되었든 간에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고로 이렇게 바위에 페인트를 부어놓은 듯한 지의류는 고착지의류라고 하고 나뭇가지처럼 생긴 모습이면 수상지의류, 잎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엽상지의류라고 해요. 지의류는 뿌리는 곰팡이고 몸체는 조류로 되어 있어 한마디로 공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균류인 곰팡이는 혼자 살아갈 수 없으나 조류는 그 반대이므로 균류가 조류에 기생하여 사는 형태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이런 고착지의류가 석물에 오랫동안 붙어 있게 되면 수백년 풍화작용에 의한 손상보다 더 심각한 피해가 예상됩니다. 실제로 기자가 문화재청 담당자에게 문의한 결과 현재로서는 뽀족한 해결방안 없다고 합니다.
왕과 왕비가 합장된 무덤 형태인 합장릉(合葬陵)은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하고 상설한 형태로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이 최초이며 대표적입니다. 조선왕릉에서 합장릉은 모두 7기가 있어요. 여기에는 왕과 원비 그리고 계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동봉삼실(同封三室)의 능이 있는데, 유릉이 이에 해당합니다. 유릉에는 순종과 순명황후, 순정황후 세 분이 하나의 봉분에 모셔져 있어요.
늘 그랬듯이, 능상에 올라가면 제일 먼저 4번 절을 하는데요. 이날은 땅이 젖어있어서 그냥 서서 간략하게 했습니다. 날씨가 이러니 인조임금께서도 이해해주실거라 믿습니다.
윤관우 기자
글쓰기 평가현수랑 기자2015.12.21
이번 기사도 윤관우 기자를 따라 설명을 들으며 능을 둘러본 듯 생생하고 멋진 기사입니다. 흠잡을 곳이 없네요.
기사 중간에 어색한 부분은
<하지만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지만> -> ~지만이 반복되어 하지만을 뺄게요.
<화강암으로 석인석으로 제작하여> -> 화강암으로 석인석을 제작하여
<아래 석물에는 신기하게도 고착지의류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해요.> 고착지의류가 생기지 않은 것
오타 정도라서 제가 수정해서 업로드 할게요 ^^
다음 기사도 기대할게요~!!!
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