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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문화가 살아있는 무령왕릉으로 오세요!
-무령왕릉 내부 모습- (출처-사회 5-2)
안녕하세요. 윤보연 기자입니다. 오늘은 무령왕과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무령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령왕은 백제의 25대 왕입니다. 무령왕은 융 또는 사마라고도 불립니다. 사마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그가 일본의 한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어로 섬을 뜻하는 사마(시마)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무령왕은 키가 6척(180cm)나 됐고 성품이 인자했다고 합니다.
-무령왕 흉상-
무령왕은 중국 남북조 및 왜와 지속적으로 교류를 했습니다. 중국 남조(양)의 문화를 받아들여 백제의 문화로 재탄생시켜 왜에 전해줬다고 합니다.
그는 해외 식민지에 22담로를 설치하여 관리했습니다. 이로서 백제는 약소국이 아닌 강대국이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가 양나라의 문화를 본보기로 삼았다는 증거-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 중 백제가 가장 강대국이었다는 증거-
이제 송산리 고분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시대의 왕과 왕족의 묘로 총 6개의 묘가 있습니다. 그중 무령왕릉을 제외한 5개의 묘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도굴, 발굴되었습니다.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입니다.)
-6호분-
역사학자들은 이 묘가 무령왕의 전 부인이거나 무령왕과 가까운 사람의 묘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배수로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굴되었는데, 1,500년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완전한 상태로 발굴되었습니다. 이는 삼국 한국 고대의 유일한 왕릉으로, 화려하고 세련된 미의 식과 창의성, 수준 높은 공예기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어 삼국 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의 기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무령왕릉에는 국보인 석수, 묘지석, 금제관장식(왕, 왕비), 금제귀걸이(왕, 왕비), 금제뒤꽃이(왕), 금제아홉마디목걸이(왕비), 금제일곱마디목걸이(왕비), 다리작명 은제팔찌(왕비), 나무머리받침(왕비), 나무발받침(왕), 청동거울(왕)과 고리장식 칼,금동신발, 나무머리받침(왕), 나무발받침(왕비), 오수전, 동탁은잔, 목재관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묘지석(왕)-
-묘지석(왕비)-
-금제관장식(왕)-
-금제귀걸이(왕비)-
-금제뒤꽃이, 금제귀걸이(왕)-
-다리작명 은제팔찌(왕비)-
은팔찌 안쪽에 기록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습니다.
-오수전-
오수전은 옛날 중국돈으로 백제가 중국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수전은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묘지석) 위에 두 꾸러미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지석에 하얗게 변한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무령왕과 무령왕릉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렇게 백제의 문화를 잘 알 수 있는 무령왕릉으로 한 번쯤은 가보는 게 어떨까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있으니 같이 가시는 걸 권장합니다.
글쓰기 평가어린이과학동아 기자2018.08.15
보연 기자, 반가워요. 백제 시대의 화려한 유물을 소개한 멋진 기사네요. 각 사진에 해당하는 간단한 설명도 좋았고, 내용도 아주 풍성하고 자세하게 소개해 준 점이 좋았어요. 현장에서 얼마나 열심히 내용을 기록하고, 공부했는지 느껴지는 글이었어요.
전체적으로 글과 사진이 잘 어우러진 점도 좋았고, 글을 통해 백제 시대의 문화 유물을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보연 기자의 마음과 생각도 잘 느껴지는 좋은 글이었다고 생각해요. 기사 아주 잘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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